사모님, 차 한 잔 하실래요?

팔자 좋은 여편네들 -그때의 기록 10

by 노을

이사하는 날 처음 본 가족이었다.

우리 집은 4층이었고, 5층에서 내려오는 그녀와

가벼운 목례로 첫인사를 대신했다.


2년 선임이지만 나보다 두세 살 어렸다.

밝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출산일이 한 달 차이로 그녀도 역시 임신 중이었다.


차 한 잔 달라며 먼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자,

언니뻘이니 편하게 지내자며

내 마음에 노크를 했다.


병원도 같이 다니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느새 마음의 문이 열렸다.

가정사에 시댁 이야기,

맘에 담아둔 말까지 풀어내며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던 그녀가 1층으로 집을 옮겼다.

과장 사모님을 비롯한 동문들과 더 많은 시간 어울리기 시작했다.

부쩍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에 안타까움이 자라고 있었다.


그 무렵 구역예배에서 그녀가 전한 내 뒷말을 듣게 된 것이다.


예전처럼 밝은 얼굴로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돌아선 뒷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 또한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장 사모가 그녀에게

왜 사모님 소리도 듣지 못하고

나에게 끌려다니냐고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 걸까.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에는 남편의 뒷말이 들려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그렇다 해도

남편까지는 아니지 싶었다.


다음 날 오전 내내 전화기를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번호를 눌렀다.


"사모님, 차 한 잔 하실래요?

제가 내려갈까요?

아니면 올라오실래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가 올라왔다.

"사모님,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따듯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눈이 마주쳤다.

"남편과 내 이야기가 왜 나온 거예요?"


당황한 그녀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내 이야기까지는 그렇다 해도 남편 이야기는 너무한 거 아니에요?"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이어가다 끝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근데 왜 그런 거예요?

우리 잘 지냈잖아요?"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말했다.

"샘이 났나 봐요.

아들을 낳은 것도, 주변에 흔들리지 않는 것도."


"아들은 내 의지가 아니고,

흔들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런 척하고 살고 있다는 거 더 잘 잖아요.

난 오히려 우리가 멀어진 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남기고 돌아갔다.

말을 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했다.

다 털어내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과 기대도 꿈틀거렸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은 내 마음과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다음날,

이야기 좀 하자며 다시 올라왔다.


"어제는 당황해서 그냥 갔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해서요.

왜 한 번도 안 한 사모님 소리를 계속한 거예요?"


"솔직히 말해요?"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에 말했다.


"욕 나올까 봐요."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욕을 하지요. 왜?"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런데 내가 너무 격해져서

정말 그럴까 봐 조심한 거예요.

비아냥거린 건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닫힌 현관문 사이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된 마음속 골목을 지나듯 씁쓸하고 무거운 소리가 계단 위로 울려 퍼졌다.


어쩌다 마주쳐도 형식적인 인사만 주고받았다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좁혀지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이사를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재봉틀을 꺼내 식탁보와 앞치마, 주방용 장갑을 만들었다.


작은 쇼핑백에

그간의 정과 감사함,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모두 담아 건넸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옅은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10년이 넘은 뒤였다.

같은 계룡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번호를 수소문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여전한 모습에

그때의 따듯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점심을 함께하며,

가끔 만나서 차라도 마시자고 속마음을 전했다.


대위였던 남편들의 계급장이 중령으로 바뀔 만큼의 긴 시간이었다.

섭섭함보다 아쉬움과 반가움이 더 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은 또 그렇지만은 않았나 보다.

그 후로 서너 번 만날 것을 청하였지만 선약이 있다고 거절했다.


나의 마음이 부담스러운 걸까.


그러고도 몇 차례

내 손가락이 그녀의 번호 위에서 헤매었지만 더 이상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고

그녀가 계룡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뒤,

우연히 그녀의 연락처에 눈이 머물렀다.

내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끝내

이름 옆의 '삭제' 버튼을 조용히 눌렀다.


그 자리엔 이제

한 조각의 기억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