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순

팔자 좋은 여편네들 -그때의 기록 11

by 노을

남편들의 여단 전체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모처럼 남겨진 가족들의 저녁도 여유로웠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뛰어놀았다.

가족들도 한 집에 모여 김치찌개 하나로도 푸짐한 저녁을 나누었다.


아이가 잠들고 열 시가 다 되어갈 무렵, 군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이미 남편의 혀는 꼬부라졌다.

"안 와?"

"지금 부대로 들어와야겠는데..."

"이 시간에?"

내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가족들이 들어와야 마무리가 될 것 같아..."

"애도 자는데? 가족들 전부 들어오라고?"

"응. 선착순으로..."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빨리 집에나 와!"


"가족들 다 들어오라고 연락 중이야."

남편이 뒤틀린 발음으로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미친 거 아냐?

몰라. 난 안가!"

짜증이 섞인 말과 함께 전화기를 세게 내려놓았다.


다시 벨이 울렸다.

"안 간다고!"


"선배님, 전대요."

7 중대장 가족이다.


"다 들어오래요."

"애도 자고 있는데."

"우리 애들도 자요. 가족들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데요.

선착순으로 벌칙도 준다고..."


"이게 말이 돼?"

"언제 우리가 말이 돼서 했나요.

다른 가족들도 들어가고 있나 봐요."


결국, 자는 아이를 들쳐업고 4 중대장 가족의 차에 올라탔다.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가 둘인 7 중대장 가족은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손을 잡은 채

찡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며 허둥지둥 뛰어왔다.



관사에 도착하니 공관병이 기다렸다는 듯 말없이 우리를 안내했다.


문을 열자 뿌연 담배연기가 술 냄새와 함께 목구멍으로 밀려들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삼겹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째 대기하던 상추는 패잔병처럼 시들어 있고,

미처 불판에 오르지 못한 고기 조각이 서서히 말라가며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널려있는 술병들이 그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가족과 그의 남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녀는 업은 아이를 연신 추켜올렸다.

남편의 손에는 숟가락이 꽂힌 빈 소주병이 흔들리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숟가락 소리가

누가 듣고 있는지도 모를 그들의 노랫소리와 부딪히며 희미하게 퍼졌다.


그 와중에 누구는 식탁에 숙인 채로 눈을 껌벅거리고 있고, 누군가는 벽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뿜어내며 잠들어 있다.



어정쩡한 자세로 실내로 들어서니 우리를 쳐다보며 함성과 박수를 쏟아낸다.

쭈뼛쭈뼛 발을 디밀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반은 닫혀있던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누가 먼저야?

어떤 가족이 일등이야?"

"거의 동시에 들어왔는데요!"

그들만의 어처구니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앞쪽으로 나갔다.

남편이 흔들거리는 몸으로 옆으로 와 손을 잡으며 인사를 시켰다.

"3 중대장 가족입니다."

슬쩍 손을 빼 두 손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며 나도 고개를 숙였다.


벌주가 주어졌다. 여단장이 직접 술을 따랐다.

아이를 받쳤던 두 손이 술잔을 받아 들었다.

소맥 한 잔을 들고 망설이고 있는 내게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벌컥벌컥 단숨에 잔을 비웠다.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알싸하게 속을 훑고 내려갔다.

살짝 현기증이 난 순간 다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사이 또 다른 가족들이 들어왔다.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을 때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나 가장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부쩍 배가 나온 4 중대장 가족이 7 중대장의 큰아이를 챙기며 내 옆에 앉았다.


여전히 떠들썩한 함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그 소리를 비집고 7 중대장 가족이 속삭였다.


"선배님, 기저귀 하나 있어요?"

"아니, 안 챙겼지. 왜?"

"큰 일 났네. 급해서 그냥 왔는데 똥을 싼 거 같아.

냄새나지요? 어떡하지?"

난감한 표정이다.


"어쩌냐?

자리 바꿔줄게. 자기가 이쪽으로 들어와.

곧 끝나겠지.

조금만 참아보자! "


4 중대장 가족과 내가 앞을 막아 앉았지만 냄새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셋은 마치 공범인 양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전쟁 같은 회식은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다른 가족들의 인사와 벌칙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구석에 앉아

점점 더 자욱해지는 담배연기와 소음 속에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며

묵묵히 그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남자들의 회식자리에 가족들을 선착순으로 불러내자고 제안했던 그 누군가는,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명령으로 전파한 지휘관은

알고 있었을까.


장난처럼 외쳐진 '선착순'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그 시간, 그곳에서

군인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무엇을 견뎌야 했는지.


어쩌면

인사불성으로 충성의 잔을 들이켰던 우리의 남편들도,

심지어 그 한가운데서 숨을 죽이고 있던 우리조차

그 밤의 흐름에 떠밀려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러나 우리는, 또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한 채

미련스럽게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