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좋은 여편네들 - 그때의 기록 14
저녁으로 삼계탕을 준비 중이었다.
국자로 상태를 확인하는데 다리 하나가 흐물거리며 떨어져 국물 속으로 파묻혔다.
한눈을 팔다가 너무 익힌 모양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특공에서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복날인 그날,
간부 식당의 메뉴는 삼계탕이었다.
중앙 테이블에는 여단장을 비롯한 대대장들이 착석했다.
그 옆 테이블에 참모들, 그 옆으로 열네 명의 중대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이 복날인가 봅니다."
삼계탕 한 그릇씩이 앞에 놓였다.
여단장의 숟가락질을 필두로 모두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삼계탕 맛이 끝내줍니다.
다리가 흐물흐물 잘 익었습니다."
얼마 전 전출온 1 대대장이 닭다리에서 뼈를 발라내며 말했다.
"그래?
어, 근데 내 닭다리는 왜 하나뿐이지?"
여단장의 목소리였다.
"안에 있지 않습니까?"
농담 같은 말에 누군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단장이 다시 그릇을 뒤적였다.
"없는데! 하나뿐이"
순간 모두의 입과 손이 멈춰 섰다.
오직 시선만이,
젓가락으로 그릇을 헤집는 여단장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누가 손을 댄 건가?"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사단장이 말을 받았다.
모두의 눈이 흔들리며 허공에서 부딪혔다.
잠깐의 침묵 뒤에 젓가락을 탁하고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길로 여단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본부대장이 황급히 따라나서며 말했다.
"상황을 파악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문을 나서는 여단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삼켰다.
감히 누가 그 그릇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너무 익어 다리 하나가 떨어진 삼계탕 그릇이
하필 여단장 앞에 놓였을 뿐이었다.
결국 그날 본부대장은 여단장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관리소홀의 책임은 그의 몫이었다.
며칠 후,
본부대장 내외와의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술잔에 담긴 건 술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였다.
웃고 있었지만 그의 어깨는 끝내 펴지지 않았다.
본부대장의 무게는 고스란히 그 가족의 몫이 되어 그녀의 어깨에도 내려앉았다.
그녀는
김치와 반찬을 냉장고에 채워,
여단장 사모님의 빈자리를 메꿨다.
사모님이 오시면 불편함이 없도록 챙기며 때로는 운전기사 역할까지 맡았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했다.
밤늦게까지 관사에 머물렀다.
그 시간, 아이들은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흩어져도 여전히 놀이터를 떠나지 못했다.
그네에 앉아 관사 쪽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다른 가족의 손에 이끌려 그 집 식탁에 앉아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나도 바쁜 그녀를 도와
아이를 챙기고 전을 부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녀의 자리에 있지 않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해 가을 특공에서 5년 차인 우리는 계획인사로 이동을 해야 했다.
가평의 부대로 전출이 확정됐다.
그런데 보직이 본부대장과 군수장교뿐이었다.
보통 본부대장은 고생한 만큼 인정받고 평정을 챙겨주는 자리로,
진급에 유리했다.
반면 군수장교는 진급이 잘 나오지 않은 자리였다.
사단 인사 장교는
다음 해에 소령진급이 들어가는 우리가 당연히 본부로 갈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윗분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출 자신이 없었다.
본부대장 가족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그녀의 두 아들도.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한테 정말 미안한데,
나 아무래도 못할 거 같아. 자신이 없어.
무엇보다 우리 애들이 방치되는 게 너무 싫어."
남편은 결국
군수장교로 명을 받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세 번째 이사를 했다.
2017년 여름,
남편이 연대장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복날, 그가 삼계탕을 반쯤 먹었을 때였다.
숟가락에 걸려 올라온 닭똥집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손질되지 않은 모래집이 통째로 들어있었다.
비위가 상했다.
방금 전까지 맛있게 먹던 삼계탕이 목구멍까지 다시 올라올 것 같았다.
그의 미간에 힘이 쏠리고 인상이 일그러졌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당을 나섰다.
식당을 관리하던 본부중대 행보관과 주임원사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뒤를 따랐다.
"죄송합니다.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문득 그는 예전 본부대장이 겪었던 닭다리 사건을 떠올렸다.
숨을 들이마셨다.
"됐다. 들어가서 식사나 마저 해."
연대장을 끝내고 4년 후,
대구로 놀러 온 부하들이
술잔에 연신 그때의 공기를 채우며 말했다.
"연대장님, 그 똥집 사건 때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니들 같으면 먹겠냐?
내가 안 참았으면, 그날 다 죽었어."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들끼린 이미 비상사태였습니다."
술잔은 어느새 추억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목소리가 자꾸 커졌다.
추억을 삼킨 웃음이 집 안 가득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