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좋은 여편네들 -그때의 기록 15
비 오는 날,
초록색 천막을 씌운 트럭을 따라온 지 4년 7개월이 된 2001년 9월.
가평으로 전출이 확정됐다.
임신 4개월이던 새댁은
그사이 다섯 살과 세 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스스로 나를 가뒀던 아파트에는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다.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던 '사모님' 소리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짬밥을 5년이나 먹은 어엿한 군인가족이 되었다.
이사를 한 주 남긴 9월 첫 주.
마지막 휴가를 내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부산을 한 번도 못 가본 것도 못내 아쉬웠다.
더구나 가평으로 가면 다시 오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코펠과 휴대용 버너, 돗자리와 얇은 이불을 챙겼다.
px에서 컵라면 한 박스와 인스턴트커피, 아이들의 간식 몇 개를 샀다.
시내에 들러 최근에 만든 카드로 현금 서비스 삼십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무릎에 지도 한 장을 펼쳤다.
울산에서 부산을 거쳐 통영까지.
이박 삼일의 일정이라는 것 외에 정해진 것은 없었다.
수확이 끝난 포도덩굴에 남겨진 포도송이가
색이 바래가는 잎사귀 틈에서 인사를 건넸다.
길가에 알록달록 코스모스도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다.
분명 시댁에 갈 때도 지나던 길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새로웠다.
아이들도 신이 났다.
"찾아라 비밀의 열쇠... 디지몬 친구들
렛츠고 렛츠고 세상을 구하자..."
요즘 푹 빠진 만화 주제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엄마, 바다야 바다."
파란 바다가 넘실거렸다.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부서지며 하얀 물거품을 연신 만들어냈다.
한적한 바닷가에 돗자리를 펼쳤다.
아이들은 이미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모래놀이를 시작했다.
보글보글 코펠의 물 끓는 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라면 먹을 사람?"
"나요, 나"
배가 고팠는지 뜨거운 컵라면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파도를 반찬 삼아 먹는 라면의 맛이
기가 막혔다.
아이들이 바다와 친해지는 동안
종이컵에 커피 한 봉을 털어 넣었다.
조르륵 물이 채워지자 커피 향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가슴을 채웠다.
눈부신 바다와 파도,
모래사장을 뛰노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남편.
이보다 더 맛 좋은 커피는 어디서도 마실 수 없었다.
무작정 해변도로를 따라 부산 쪽으로 향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바다가 우리를 계속 따라왔다.
그날만큼은 남편도 길을 잘못 들었다고 짜증을 내지 않았다.
광안리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둠이 짙어져 있었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해수욕장을 둘러싸고 식당들이 늘어서있었다. 광안대교를 공사 중이라는데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식당가 뒤편 모텔을 숙소로 정하고,
횟집을 찾다가 결국 콩나물 해장국 집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날을 잘못 잡은 것인지 가게들은 이미 문이 닫혀있었다.
어둠 속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만 들려왔다.
술꾼 남편이 하루 종일 참았던 소주 한 잔을 회대신 콩나물 국밥을 안주 삼아 들이켰다.
피곤한지 아이들이 하품을 해댔다.
넷은 그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모텔방에서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통영의 바다는 부산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더 파랗고 더 한가하고 더 평화로웠다.
이순신 동상 앞에서 폼을 잡아보고,
유람선에 부서지는 물보라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따라오는 갈매기에 깜짝 놀라 눈이 커진 아이들.
한 없이 사랑스러웠다.
언덕길을 오르니 한적한 부둣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마을 앞바다가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포근하고 따듯한,
연주황빛 노을이
수평선에 머물러 숨을 고르며 또 다른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처럼.
마을 끝에 있는 오래된 모텔에 짐을 풀었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두 팔을 벌리고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짠"
시원한 맥주잔을 맞댔다.
동네에 하나 있는 치킨집에서 시킨 치킨과 생맥주로 저녁을 대신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쌔근거리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완벽한 하모니가 되어 들려왔다.
누가 먼저인지 모를 우리만의 대화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 정도면 우리 잘 살고 있는 거 아냐?"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치?"
드르륵드르륵
오 년 전 사병들의 도움으로 날랐던 짐을
이제는 지게차가 내렸다.
천막을 덮어 밧줄로 꽁꽁 싸맸던 짐은
컨테이너가 실린 이삿짐 차에 안전하게 실렸다.
거의 모든 가족이 주차장에 모였다.
휴지며 간식 같은 작은 선물을 차에 실어주었다.
나도 정성껏 포장한 냄비 받침 하나에 마음을 담아 그들에게 건넸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차에 오르자,
모두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갔다 올게..."
철없는 아이가 친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입가에 웃음이 퍼졌다.
그리고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2022년 남편이 대구로 발령을 받고
그곳을 다시 찾았다.
봉숭아 꽃이 물들던 과수원 자리에 공업단지가,
포도알이 반짝이던 포도밭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의 눈물이 여전히 묻어 있을 것 같던 특공부대 아파트도, 놀이터도 모두 사라졌다.
그곳에서 더 이상
그 시절의 남편도, 나도
놀이터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