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좋은 여편네들 -못다한 이야기 01
2001년 가을이 물들어갈 즈음,
가평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나무들도 가을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1층이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가장 시급한 일은 아이들을 보낼 곳을 정하는 일이었다.
다섯 살이 된 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싶었지만 학기 중이라 빈자리가 없었다.
미술학원에 보내기로 했다.
세 살, 작은 아이도 어린이집에 등록했다.
이사 전,
큰아이만 어린이집에 보내고
'신기한 영어나라'라는 학습지 방문수업을 받고 있었다.
계약 당시, 이사를 갈 수 있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말했다.
"백령도 빼고 안 들어가는 곳은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백령도가 아닌 가평에서 수업이 어렵다고 했다.
군인아파트는 차로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사놓은 비싼 교재였다.
궁리 끝에 미술학원을 찾아갔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주일에 한 번, 원장실을 빌려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날이 되면 교재를 챙겨 학원에 가서,
이삼십 분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날이 추워지자 더 이상 밖에 있을 수가 없었다.
학원 복도를 서성이고 목을 늘여 교실을 기웃거렸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원장님이 서있었다.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불편해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입학 상담이라도 있는 날엔 더욱 신경이 쓰였다.
객이 주인행세를 하는 꼴이었다.
학습지 선생님에게 제안을 했다.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집에서 수업하는 게 어떨까요?"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나의 대기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선생님의 기다림이 길어지기도 했다.
급하게 움직이던 어느 날, 사고가 날 뻔했다.
결국, 교재를 포기하고 선생님이 들어오는 다른 학습지로 갈아탔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초등학교를 네다섯 군데 옮기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몸과 마음은 더 지쳐갔다.
특히 학기 중 전학은 아이들에게 가장 높은 산이었다.
새로운 교과서와
또 다른 교복을 구하느라 애써야 했고
점심시간 눈치를 살피며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친구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미 들어앉은 그들만의 텐트에,
문을 열어 반겨주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학업의 속도는 늦어지고, 왕따라는 불청객의 부름을 받기도 했다.
며칠을 붙들고 있어도 답은 하나였다.
남편은 가고, 가족은 남는다.
아빠가 떠나고 아파트를 비워야 했다.
세를 내어 엄마만 남았다.
계룡 엄사리에는 그렇게 자리를 잡는 가족들이 많았다.
그래서 '엄사리'를 '엄마만 사는 동네'라 불렀다.
주말부부가 됐다.
말이 주말부부이지
남편은 한 달에 한번 오기도 어려웠다.
머지않아 월말부부가 되었다.
'쾅' 소리와 함께 방 문이 닫혔다.
엄마와 아이의 전쟁이 시작됐다.
사춘기 아이들의 시간에는 엄마의 인내와 노력도 함께 흘렀다.
어쩌다 집에 온 남편에게
그 시간을 토해내는 엄마에게서,
아이는
아빠한테 자기를 일러바치는 마녀의 모습을 보았다.
또 한 번, 총성 없는 전투가 치러졌다.
지휘관도 없는 전투의 흔적은 서로에게 고스란히 남았다.
집안 가득 냉기가 채워졌고,
한동안 서로의 눈을 피했다.
그때의 아이는 더 이상 내 아이가 아니었다.
엄마의 시간이 다 닳아갈 즈음,
몸과 마음이 커진 아이가
서서히 제 빛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웃음이 돌아오고 조금은 다른 말로 앞으로의 날들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서툴고 힘들다는 이유로
믿음과 사랑을 전하는 것에 소홀했던
그 시간들은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그리고 아직도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순간
함께하지 못한 빈자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