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팔자 좋은 여편네들-군인가족의 라떼이야기04

by 노을

정리가 대충 끝나가는 이사 한 지 열흘쯤 된 어느 날,

욕조 위에 올려놓은 통돌이 세탁기에서 힘겹게 빨래를 꺼내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윗 집인데요~. 통로 방문을 해야 하는데 낼모레 어때요?

아래 사모님이 그때가 괜찮으시다는데."


통로 방문을 하라는 통보였다.

집으로 방문을 할 테니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일종의 신고식이다.

언제가 가능해요?라고 묻는 게 상식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 시간은 보통 통로에 사는 가장 높은 사모님의 스케줄에 의해 정해진다.


다과와 차를 준비하고 기다리니 열 시쯤,

휴지와 가루세제 한봉을 들고 대여섯 명의 가족들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1대대 3 중대장 가족입니다." 이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들도 인사과장 가족, 본부대장 가족, 통신대장 가족등 남편의 직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다음은 출신이 뭔지, 몇 기인 지를 묻는다.

그것 역시 남편의 출신을 의미한다.

육사 몇 기, 삼사, 학군 그리고 학사 몇 기 등을 밝히고 나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남편의 기수를 중심으로 이 사람은 위, 이 사람은 아래를 판단하면

내 위치가 정해진다.


대위를 달고 증평에서 1차 중대장을 끝내고 2차 중대장으로 갔을 때이다.

미혼인 소대장을 빼고 기혼자들 대부분이 선임이었다.


그때부터 갓 결혼한 나는 새댁이고, 나머진 사모님이다.

통로 방문을 한다고 전했던 윗집 가족도 두세 살 어리지만 2년 선임 사모님,

옆 통로 사는 네 살 어린 동생도 사모님이었다.


그들은 내게

'자기야' 아니면 '새댁'이라고 불렀다.

아이가 있으면 누구 엄마라고 부르는데, 신혼이고 아이가 없다 보니 나보다 나이가 어린 그들조차 그렇게 불렀다.


남편이 스물아홉, 내가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다.

이른 편이 아니었다.

남편보다 2,3년 선임이라 하더라도 남편과 한 살 차이인 나보다 어린 가족들이 많았다.


남편이 군인이지 자기들이 군인도 아니고 언니 동생 하면 될 것을,

동생뻘 되는 애들 한 테까지 왜 사모님 소리를 해야 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지금은 술술 나오는 사모님 소리가

왜 그렇게 닭살 돋게 느껴지고 자존심이 상하던지

도무지 목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스스로 나를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안 부딪히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혼자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선생이었다고 어울리지도 않고 거만을 떠는 거야!' 라며 많은 말이 오갔다고 한다.

그런데 난 그것도 몰랐다.


친정식구도, 친구들도

쉬지 않고 달려 여섯 시간은 걸여야 만날 수 있었다.

운전도 못하니 어딜 가지도 못했다.

하루 세 번, 시내 나가는 통근버스가 다인 그곳에서.

핸드폰이 있는 것도, 낮에 티브이가 나오지도 않던 그 시간을.

스스로 나 자신을 가두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 방문은 몇 차례 더 이루어진다.

같은 소속의 대대방문이 끝나면,

출신이 같은 가족들이 동문방문을 한다. 그러면 또 기수를 따져 선후배가 나뉜다.


종교별로 목사님이나 신부님과 함께 하는 신방까지 끝나고 나면 방문이 마무리된다.

그제야 1대대 3 중대장 가족의 신고식이 끝이 난다.


이로서 이 아파트에서

나의 서열이 몇 번째인지,

누가 사모님이고 누가 선배님인지 호칭이 정리되는 것이다.


남편의 서열이 곧 나의 서열이 되었다.

그 과정 어디에도 내 이름이나 나 자신은 없었다.

군인과 결혼한 그 순간부터 3 중대장 가족, 2 대대장 가족, 군수과장 가족이었다.

남편의 직책이 곧 내 이름이 되었다.


부부동반 모임은 물론 회식자리 좌석표에서도,

행사로 가슴에 이름표를 달아야 하는 순간에도,

내 이름이 아닌 누구의 가족이라는 이름표가 붙여졌다.


정말 친한 가족이 아니면 일 년, 이년을 같이 살아도 이름을 모르고 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온 대가로

전역식날,

누구의 가족인 나에게 '감사장'이 수여됐다.


드디어 공식석상에서 내 이름이 불려졌다.

그리고 그 감사장엔

누구의 가족이 아닌 내 이름 세 글자가

또렷이 적혀있었다.

근 삼십 년 만의 일이었다.



'방문' 처음엔 너무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집에 들여 내 모든 것을 보여줘야 했다.

하고 싶지 않은 내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 말을 해야 되나 저 말은 괜히 했나 신경 쓰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은 감사한 일이었고 선배들의 삶의 지혜였다.


생전 와본 적도 없던 타지에서 외로운 삶, 더욱이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 외지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시간을 통해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어색한 시간을 줄여주고

동병상련의 어려움을 가진 친구,

언니 같은 선배,

동생 같은 후배를 만나게 된다.


물론 엄한 시어머니나 못된 시누이 같은 사모님의 눈치를 보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의지하고,

어려움을 나누고 함께 아이들을 키운다.


잦은 남편의 부재로 혼자 감당해야 하는 육아의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혼자 웅크리고 있던 나에게 손 내밀어,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도 그들이었다.

그때의 인연들과 이십 년을 넘게

아직도 연락하고 서로를 챙기고 옛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어쩜 그 '방문' 덕 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