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물 내려가요~

팔자 좋은 여편네들-군인가족의 라떼이야기05

by 노을

여섯 시 반쯤 남편이 출근을 한다.

윗분들의 출근시간 전에 출근하고 퇴근 후에 퇴근하는 것이 암묵적 룰이다.


보통은 남편이 문을 나서면 다시 침대로 돌진하는데,

물을 내리는 날은 시간이 애매하다.

사모님들이 아이를 등교시킨 8시 어간에 물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비포장 도로며 연병장, 훈련장을 휩쓸고 다니던 군화 때문에

아파트 계단은 모래와 먼지로 금세 더러워진다.

비라도 오고 나면 흙덩이가 굴러다닌다.

그래서 최소 이주에 한 번,

비가 오면 다음 날쯤 물청소를 해야 한다.


지금처럼 관리비를 내면 청소를 대행해 주는 것도 아니고,

산속에 달랑 하나 있는 아파트 청소는 당연히 가족들의 몫이다.


보통 통로의 맨 막내가 선임 사모님께 전화를 한다.

"사모님 낼 물 내릴까요?"

허락이 떨어지면 다른 사모님들 한테도 상황을 전파한다.

5층 아파트의 로열층 2,3층엔 선임들이 4,5층에 후임들이 사는 경우가 많다.


준비해 놓은 긴 호수를 화장실 수도꼭지에 연결한다.

큰 대야 두어 개에 물을 가득 담아 놓는다. 시작할 때 물을 한 번에 많이 내려야 청소가 쉬어진다.


받아놓은 물을 복도로 확 쏟아부으며 물청소가 시작된다.

두세 차례 시원하게 쏟아붓고 나면,

호수를 들고 물을 뿌린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들은 비로 열심히 물을 쓸어내린다.

굳어 있는 흙들이 쉽게 떨어지지 않기에 여러 번 바닥을 문질러가며 쓸어야 한다.


뻔히 물 내리는 날이니 소리가 나면,

사모님들도 알아서 문을 열고 마중 나오는 심정으로 윗계단 두어 개쯤 쓸어준다.

그런데 아래층 현관까지 쓸고 내려가도 문이 열리지 않는 집이 있다.

그러면 노크를 한다.


너무 세게 두드려서 기분이 나쁘시면 안 되므로 적당한 세기로 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사모님 물 내려가요~."


문이 열리고 사모님이 나왔다고

내 집 앞을 다 쓸었다고

혼자 들어가는 일 따위는 절대 하면 안 된다.

그 속도 그대로

내 집 앞을 청소하듯

아래층으로 열심히 비질을 해야 한다.


"자기야, 물 잠가도 되겠다."라는 사모님의 말이 떨어지면

잽싸게 올라가 수도를 잠근 후,

위에서부터 다시 마지막 물을 쓸어내린다. 최대한 물이 계단에 남아있지 않도록.


위층이 선임이라면,

물 내리는 소리가 나는 순간

위층의 반까지는 올라가서 쓸고 내려오는 예의쯤은 기본이다.

아이가 없을 땐 그나마 괜찮은데 아이가 어릴 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윗집 아이가 계단 끝까지 기여 나와 기겁하고 뛰어올라가 잡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 이후엔 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큰 가방이나 박스 같은 걸로 입구를 막아놓기도 했다.

인터넷만 뒤지면 낼 아침에 필요한 걸 갔다 주는 시절도 아니다.

보호 펜스 같은 것이 있기나 했는지도 모르겠다.

각자 최선의 방법으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


아이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맘 좋은 사모님이

"애기 운다. 얼른 가서 챙겨."라는 말을 해주기까지 열심히 비질을 한다.


그렇게 1층의 현관 앞까지 쓸어내고 쓰레기까지 정리하면 얼추 마무리가 된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물 내리기가 끝이 나는데,

위층부터 비질을 한 손이 얼얼하고 물집이 잡히기도 한다.


한 달에 한번 마지막주의 물 내리기는 반상회로 이어진다.

반상회는 순번대로 하면 되니 일 년에 한두 번쯤 차례가 돌아온다.


아이가 생기면 반상회 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이 챙기고 물 내리고 반상회 준비까지, 새벽부터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청소한 계단이 다시 흙투성이가 되는데 채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

'또 물 내려야겠네~. '

아래층 사모님의 혼잣말이 무서워지는 순간이다.


한 달에 한번 훈련 없는 일요일 아침. 아빠들이 모여서 잡초 제거며 아파트 주변정리를 하기도 한다.

그때도 집집마다 순번을 정해 간식을 마련한다.


남자들의 청소가 끝나고 나면

가족들이 준비한 음료나 막걸리, 어묵국이나 전 같은 걸 함께 먹으며

청소의 마무리 겸 남자들의 반상회가 열린다.


그게 또,

무슨 음식을 준비해야 할지 은근히 비교되고 신경이 쓰인다.


대청소가 있는 날은 일요일 오전이 그렇게 가버린다.

토요일까지 근무를 할 때이니

청소가 있는 주말은 꼼짝을 할 수도, 어디를 갈 수도 없다.

대번에 '3 중대장은 어디 갔나?'로 반상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산속에 달랑 하나 있는,

삼십 가구도 안 되는 특공부대 아파트에서 빈자리는 너무 쉽게 티가 난다.

그래서 더욱 나의 빈자리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