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좋은 여편네들-군인가족의 라떼이야기08
"오늘은 일찍 올게.
저녁 하지 말고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결혼 후 두 번째 맞이하는 생일날 아침이었다.
완연한 봄 햇살이 눈부시게 거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니 향기로운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눈물 나게 을씨년스럽고 삭막하던 겨울의 과수원은
봄바람과 함께
분홍빛 복숭아꽃으로 언덕을 뒤덮어 가슴 설레도록 아름다운 봄인사를 건넸다.
4월 말이 되자,
언덕 밑 사과나무는 연분홍 봉우리를 구름처럼 하얀 꽃으로 피어올렸다.
그러더니 아침마다 향긋한 꽃내음을 한아름씩 선사했다.
이곳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이사를 하던 그때는 몰랐었다.
긴 겨울이 지나면 당연히 흐드러진 꽃으로
향긋한 과일로,
그보다 더 긴 시간 아름다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너무 크게 자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해진 집안 가득
꽃 향기를 채우고 나니
따듯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결혼 후 첫 생일은 5월 9일이었다. 어버이날이기도 했고
오로지 신랑과 시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은 맘으로 카네이션 한 다발을 사들었다.
증평터미널에서 제천으로, 영월로 그리고 파출소장으로 관사생활을 하시고 있는 녹전이라는 곳까지
네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혼자 시댁에 갔다.
신랑도 없는 시댁에서 잠을 설친 생일날 새벽,
소란스러운 소리에 깨어보니 어머님이 김밥재료를 준비 중이셨다.
얼마 전 군에 간 막내 시동생의 훈련소 퇴소식 날이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재료에 입이 벌어졌지만 열심히 김밥을 말았다. 삼십 줄도 넘었다.
잠도 덜 깬 눈으로 그냥 열심히 말고 또 말았다.
처음엔 어머님의 그 큰손에 놀랐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더 잘 안다.
큰 덩치에 비례해 먹성들도 어마어마했다.
미역국 대신 김밥 꼬다리로 아침을 해결하고
시부모님, 둘째 시동생과 함께 강릉으로 향했다.
퇴소식후,
부대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자대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런데 동기들과 술 한잔 한다고 나간 시동생이 밤이 늦도록 들어오질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불안해하고 있는데 술집이라며 숙소로 전화가 왔다.
서둘러 가보니
같이 술을 마신 동기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시동생 혼자 술이 떡이 되어 돈도 못 내고 붙들려 있었다.
카드도 없을 때고 현금을 내야 했다.
시부모님 지갑에, 내 비상금까지 털어 술값을 내고 숙소로 데려왔다.
다리가 풀려 후덜거렸다.
새벽부터 지칠 대로 지쳤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편도 없는 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 건지.
하루가 몹시 고단했다.
그렇게 첫 번째 생일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두 벌뿐이 없는 임신복 중에서 노란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일찍 온다니 여섯 시 반에는 오겠지 하며.
그런데 7시가 다 되어가도 연락이 없다.
창밖을 열심히 내다보아도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려 보아도 소식이 없다.
'뭐야? 연락이라도 해주던가!'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가 시끄럽다.
삼십 분을 더 기다리다 전화기를 들었다.
"삼중대장 퇴근했나요?"
"무학산에 산불이 나서 여단 전체가 진화작업 나갔는데요."
"아! "
불이 났다고 했다. 부대 뒷산 무학산에 등산객의 실화로.
연락이라도 해주지.
8시가 넘어가도 깜깜무소식이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덜컹덜컹 소리도 요란하게 라면 하나를 끓였다.
맛대가리도 없다. 반도 못 먹겠다.
10시가 넘어가니 걱정은 불안으로 변했다.
뭔 일이 있는 거 아니겠지? 별일이야 있겠어?
11시가 다 되어갈 때쯤에야
밖이 소란하더니 급하게 뛰어 올라오는 군화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군화소리에 안도감이 화가 되어 올라왔다.
식탁에 앉아 팔짱을 끼고 문만 노려봤다.
덜커덕 문이 열렸다.
"미안해. 헉헉"
"기다리지 않게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해줬어야지!"
한바탕 잔소리를 장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쏘아댈 수가 없었다.
그을음에 시커메진 얼굴, 땀 얼룩, 꾀죄죄한 몰골.
바람과 함께 들어온 땀 냄새, 코를 찌르는 그을음 냄새에
장전했던 잔소리가 스르르 힘을 잃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내린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고! 밥은?
라면이라도 끓여줘?
얼른 씻어야겠다."
"미안해."
남편의 진심과 눈이 마주쳤다.
"씻고 맥주 한 잔 할래?"
서둘러 라면 물을 올렸다.
"내년 생일엔 좋은데 가자."
"알았어. 얼른 씻기나 해."
남편의 시커먼 얼굴에 고단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불타던 두 번째 생일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