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론을 마치며
얼마전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다가
잠시 쉬는 여백에,
문득 고교 시절 교련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해도
저 친구는 안 갈 거야~
그렇게 보인다는 건
이미 너의 자리가 단단하다는 뜻이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왜 나는 빠질 것 같은 사람일까?’
스스로를 오해하며 부끄러워 했었다.
하지만 살아 오면서,
또 일본의 고요한 거리를 걸으며
비로소 그 말의 다른 결을 읽게 되었다.
자기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비워진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걸.
친구들과 가고시마에서 보낸 시간은
활기차면서도 이상하게 고요했다.
걸어도 좋았고,
우연히 들어간 카페도 좋았고,
마트에서 사온 사케 한 병만으로도
밤은 충분히 따뜻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
누군가 이덕무의 문장 ‘최상의 즐거움’을 기억해내
우리는 작은 숙소에서 그것을 함께 외워보았다.
익숙한 문장이
낯선 장소에서 다시 살아나는 순간,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조용히 확인하게 되었다.
중론 수업을 들으며 늘 헷갈렸던 말,
“모든 법은 연기하고,
스스로 그러함도, 고정됨도 없다.”
여행지에서 이 가르침은
유난히 쉽게 이해되었다.
정답을 쥐려 할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흐름을 믿을수록 풍경이 넓어진다.
어떤 관계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어떤 마음은 자연스레 멀어지기도 한다.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되는 것들,
애써 정의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중도라는 이름으로
내 삶에 스며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교련 선생님의 말,
여행에서의 고요,
중론에서의 ‘연기’라는 사유는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꼿꼿하다는 뜻이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이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려 하지 않고,
흐름을 믿어보는 마음이 단단해졌다.
교련 선생님이 말했던
‘단단한 자리’는
누구에게나 보일 수도 있고
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의 중심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고시마의 바람,
친구들과의 대화,
중론의 문장들—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나라는 사람의 안쪽을 조금 더 밝히고 있었다.
흔들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