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로 휴가 중 통일 전망대를 갔다가 나오면서 송지호해수욕장에서 맨손오징어잡이 축제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도로 옆에서 펄럭거렸다.
큰아이 5살 즈음 여름에도 맨손오징어잡이 체험을 했었다. 아마 그때 둘째, 셋째는 너무 어려서 못하고 셋만 신청했다.
한정적인 공간에서 하는 것이라 아이, 여자, 남자 다 따로 했었다.
먼저 큰아이가 오징어를 잡고 나왔을 때 대견함과 씩씩함이 나에게는 컸나 보다.
그때의 추억으로 다시 오징어잡이를 신청했고, 그때처럼 재미있게 하고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삼 남매만의 신청이었다.
둘째 셋째가 오징어를 잡을 때만 해도 한 손에 하나씩은 아니더라도 한 마리씩을 잡아 나왔다.
자기들 힘으로 잡았고 재미있게 했고, 스스로 뿌듯해하니 됐다고.
문제는 큰애의 자리였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의 어중간함.
어디를 가나 어른에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등학생도 아닌 어중간함.
관계자말로는 중학생은 어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그렇게 신청을 했다. 모든 경쟁을 큰아이는 남자 어른들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즐겁게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고 작은애 들이도 그랬으니 한 마리는 잡아 나오겠지라는 생각도 했긴 했다. 그렇게 즐겁게 회를 먹고 놀다가 간다는 아주 즐겁고 안일한 상상을 했다.
아들 키는 175라고 하지만 몸무게는 그 키에서 10킬로 정도 빠지니 몸으로 경쟁하기는 힘들었고, 그 옛날의 양보하는 어른들은 없었다. 그때는 완전 꼬꼬마 아기들이었으니 손에 오징어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계자분이 잡아서 아이손에 쥐어주었다. 이번에도 그런 감성을 믿었나 보다.
사회자의
“꼭 한 사람에 1 마리 내지 2마리만 잡아서 나오세요...”
옛날 추억의 감성에 취해 그 말의 이면을 읽지 못했다.
편법들이 난무했다.
호주머니에 잡은 오징어 넣어 나오는 사람은 양반이었다.
그물 밖에서 비닐봉지를 가지고 대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물까지 가지고 온 사람.
‘허걱~ 우리 아들은 못 잡겠구나 또 입이 한발 나오겠네.’
‘어째야 하나? 무슨 말을 건네어야 풀릴까? 괜히 하자고 했어!!’
맘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큰아들은 성공과 실패에 민감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이의 성공과 실패에 예민한지도 모른다.
아무리 둔한 아이라도 아이는 엄마를 보고 큰다고 하는데 큰아들도 아마 엄마의 표정부터 살폈을 것이다.
아이가 실패하면 또 내가 눈치를 봐서 애가 더 민감하게 그쪽이 강화가 되었겠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계속 돌고 도는 악순환이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자의 초기증세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큰아이와의 관계에서 패턴이 그런 것 같다.
큰아이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저 바닥에는 처음 키우는 아이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아마 이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 아이를 민감하게 만드는 패턴을 만들게 했던 것도 같다.
이것도 나의 변명 같다.
오늘 글의 결론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한 걸 어렵게 푸는 내가 지금도 단순한 일을 어렵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