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피의 소망
엄마는 오늘도 굳게 닫힌 요양원에서 자유의지로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몇 년 전 가을이 오고 있을 즈음에 다급하게 나를 찾으셨다.
그때만 해도 유선전화번호를 누르시고 나에게 전화를 거시곤 했다.
“언제 올래? 왔다 가거라.” 하셨다.
나는 늘 비상 대기조가 되어 어머니의 호출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일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엄마가 나를 부르지 않아도 매주일 요양원에 찾아가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나는 “내 엄마니까.” 내가 돌봐드려야 한다는 의무 아닌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우리 엄마 모습이 곧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내 인생의 등불이고 내 둥지가 되어 주셨던 분이다.
아버지의 뒷부분을 말없이 감당하시며 응어리지셨던 마음의 푸른 멍을 한 번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으셨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지 벌써 11년이 되었다.
“엄마, 아버지 생각 안 나?” 물었더니 말없이 고개만 설래설래 흔드신다.
내가 보기에는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어머니를 오늘도 만나보고 왔다.
엄마는 내가 손을 잡으며 “엄마, 잘 지냈어?”하며 다가서면 “뭐 하러 왔어? 캄캄한데.”하신다.
백내장이 심해져서 뚜렷하게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토록 시설에 가기 싫어하시던 어머니셨다.
나는 우리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실생활에서는 결국 핑계를 대며 어머니를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부모 자식이니만큼 다른 사람보다는 한마음 한뜻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인생은 어쩜 손에 닿지 않는 뜬구름 같은 것이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나이쯤에 알게 되었다.
어둠이 우리를 덮어오는 제법 쌀쌀한 늦가을 저녁이다.
5명의 손자 손녀가 다 우리 집에 모였다.
우리 집에 오면 TV리모컨 쟁탈전이 벌어진다.
요즘 아이들은 같은 프로를 함께 보지 않으려 한다. 자기만이 좋아하는 채널이 있다 보니 적절하게 야로를 부리지 않으면 울고 불고 떼를 쓰게 된다.
“자, 얘들아 여기를 봐라. 누가 이것 가지지 않을래?”하면서 일단은 관심을 분산시킨다.
저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면 잠시 평화가 오는 듯하다.
우리 아이들을 보다 보면 어쩜 이 아이들도 각자의 생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아이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오늘 군산에 다녀오면서 누나집에 들렀다.
그래도 형제라는 끌림은 있어서 누나는 이것저것 챙겨서 주신다.
전에 없던 애정을 보이는 것은 누나도 늙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누나는 유독 아내와 친밀하게 지낸다. 우리 형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친밀하고 다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어머니 면회 같이 가기 전에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제법 맛집으로 알려진 생선탕 집에서 식사를 했다.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의 표현 일 것이다. 그래서 함께 밥을 먹는 가족이 제일 친밀한 것이라 나는 믿는다.
어머니를 뵙고 누나집에 잠깐 들렀는데 작은 어항에 구피가 가득해 보였다.
예전에도 구피를 키워본 경험이 있었기에 몇 마리 얻어가 볼 요량이었다.
우리 손주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몇 마리 달라고 했다. 새끼를 낳아서 그런지 꽤나 많아 보였다.
“구피랑 함께 살아볼까?”하니 아내도 기꺼이 동의했다.
물한바가지 구피 20여 마리를 담아서 집으로 왔다.
마트에 가서 투명 둥근 볼을 사고 볼 받침을 사 왔다. 수초를 넣고 작은 돌멩이도 넣어서 구피들이 좋아할 환경을 만들고 구피를 넣어 보았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았다.
누구랑 함께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여러 경험으로 볼 때 사람은 그런 관계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다.
성장하여 독립을 하게 되니 우리와의 관계보다는 자기네 가족 중심이 되었고 우리 부부에게는 자기들의 어려운 부분을 감당하게 했다.
부모는 자녀에게 영원한 의무와 책임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부양의 책임이나 의무를 다하려 하지 않게 된다.
오늘 수요일 저녁이 되었다.
여전히 이날 저녁에는 다섯 손주들이 다 우리 집에 모인다.
아이들을 우리 집에 맡기고 자기들의 생활을 하고 있다.
어찌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되어있고 할아버지가 지게 되는 의무감도 생겼다.
구피보다도 사랑스럽고 예쁜 손주들이라 생각하기에 특별한 불만은 없다.
하지만 때로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아이들과 놀아주는 상황을 피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쓰기도 한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우리 가족 모두의 삶에서 나는 항상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최소한 우리 가족은 “한마음 한뜻으로 살 수 없을까?”라는 문제를 던지곤 했다.
나는 감성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둡고 불확실한 미래에 등대가 되고 싶었다. 우리 가족을 위해 삶의 풍랑을 이기게 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다.
나는 퇴직 이후 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비전 없는 시간에서 많은 심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사람들은 오롯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갈 뿐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는 많이 인색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사생활은 조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회사가 다 알아서 지시해 주었기에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면 되었었다.
이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혼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니 겁이 나기도 한다.
우리와 같은 퇴직 동기들은 대부분 오늘도 일터로 나가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미칠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사회 어느 곳이든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행 일 년 만에 마음에 깊은 생채기만 남긴 채 보람 없이 일을 마감하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나 혼자만의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도 있기에 별다른 일터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도 자유롭다.
마치 구피처럼 말이다. 작은 어항에서 헤엄치며 동료들과 따로 홀로인듯 살아가지만 구피는 한 번도 외롭다고 하지 않았다.
구피들은 아마도 한마음 한뜻으로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작은 어항이지만 쉬지 않고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라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다.
너에게 다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서로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을 살아가자고 권면하게 된다.
내가 나를 모르면서 너를 알려고 하는 나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꿈을 꿀 수도 없고 같은 비전을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직 각자의 인생이기에 어우러져 살아가는데 적잖은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올해는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몰라하여 아버지 기일을 잊어버리고 지나쳐 버렸다.
이런 일을 나 외에 우리 형제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지났어도 나만 아는 사실이기에 부끄럽지만 다시 한번 마음 안에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는 한마음 한 뜻으로 살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