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 되는 순간들
시간의 깃털에 붙어 헛헛한 공간을 비행하다 보면 뱅그르르 꼬라뱅이하는 낙엽처럼 땅에 닿을 때가 있다. 우리네 소중한 삶에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낙엽처럼 발길에 짓밟히고 채이곤 한다. 예술적 감미로운 관점에서 살아야겠다는 강열한 생존의지는 누구에게라도 목적의식으로 투영될 것이다. 높은 나무 위 가느다란 가지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을하늘 아래 설익은 바람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젊은 날의 일탈로 시작된 사랑의 그림자는 무뎌진 감각을 반영하 듯하다. 사람 관계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나를 발견하게도 되지만 줌인을 하게 되면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서 부끄러운 시간들에서 색다른 관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오늘도 나만이 추억하는 아름다운 기억과 나만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빛바랜 예술가의 슬픔이 창밖에 쏟아지는 진눈깨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나의 청소년기의 생기 넘치는 나의 삶은 평범한 일상에서 진짜 나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나의 인생도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어지럽혀지는 도로의 가장자리의 낙엽무덤처럼 무딘 감각을 일깨워준 찬바람에 마주하게 된다.
습기를 머금은 가을 아침 무거운 아픔을 끌어안고 누워있는 정형외과 물리치료실로 향했다. 아침에 아내가 정성스레 싸 준 도시락을 들고 나오면서 아내를 향해 “오늘도 태워다 줄까?”하니 알 수 없는 미소로 “그럼 좋지”한다. “얼른 준비하고 나와, 차 가지고 올라올게.” 나는 바쁜 출근길에 내 도시락을 싸준 아내에게 작은 감사의 표현이었다. 아내는 시니어 일자리에 나가고 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지만 요즘 들어 걷는 것이 힘이 드는 듯했다. 초등학교 안전보안관이라는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면서 어쩌다 일화를 얘기해 주기도 했다. 아침 출근길에 차량들이 몰리다 보니 정체되는 시간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차로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걸어가는 것보다는 차를 타고 가는 것이 훨씬 좋다고 한다. 아내를 내려주고 다시 방향을 돌려 서신동 공원을 지나온다. 낙엽이 하나둘 무심한 바람에 의지해서 떨어지고 있다.
삶은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방향성도 목적지도 없이 떠있는 부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현실의 문제에서 어떤 해답을 찾아갈 것인가? 하루에도 수많은 것들을 보면서 살아가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정형외과에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 벌써부터 여럿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도 이곳에 매일처럼 다닌 지가 벌써 5개월째가 되었다. 접수를 받는 간호사들은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접수를 해준다. 창구를 담당하는 직원은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물리치료실 접수번호를 쪽지에 적어서 내밀면 물리치료실에 제출하게 된다. 물리치료사는 비어있는 방을 확인하고 몇 번으로 가라고 안내를 해준다. 오늘은 “6번으로 가세요.”한다. 같은 룸에 5번에는 다른 분이 오셔서 온찜질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 놓을까요?” 늘 하는 치료인데도 관심 없는 듯 물어본다. “허리에 두 개 놓고요 다리에 하나 놓아주세요.”라고 말한다.
약 30분가량 하게 되는 온찜질팩을 놓으려고 묻는 말이다. 치료실 여기저기에서 치료사와 하는 이야기들이 시끄럽기도 하다. “어디 해드릴까요?” “허리?” “어깨?”하면서 다정하다는 의미에서 반말 비슷하게도 한다. 아마도 이병원에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오는 듯했다. 나도 노인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오는 이유는 병원장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어도 신뢰가 없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병원 원장님은 나에게 늘 변함없이 사무적인 말씀을 하신다. “낫게 해 드릴게요. 약은 좋은 것으로 드릴게요.” “꾸준히 치료받으세요. 내일 또 오세요.”한다. 나는 세뇌가 되듯 늘 들어온 말이지만 그분을 신뢰하고 나의 통증치료를 맡기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곳 병원을 찾고 있다. 조금은 더디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동안 이곳에서 두 어깨를 수술하지 않고 나았고 허리병도 나았었던 경험이 있어서 나름 신뢰하는 까닭일 것이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이어지는 물리치료는 온찜질과 초음파치료, 그리고 전기치료와 견인치료로 진행된다. 물리치료를 마치면 원장님의 진료상담을 기다린다. 원장님은 언제나처럼 “나아지셨지요?”하고 묻는다. 나는 “좋아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치료 잘 받으시고 운동도 하셔야 합니다.” “약은 있지요? 주사 좋은 것으로 드릴 테니 낼 또 오세요.”한다. 주사실로 이동해서 주사를 맞기 위해 나의 뽀얀 엉덩이를 까 보인다. 왈가닥 같은 나이 든 간호사는 주삿바늘을 치켜들고 오늘은 왼쪽에 맞을까요? 하며 매우 친절한 듯 그렇지 않은 자세로 주사를 놓고 나더러 엉덩이를 많이 문지르라고 한다. 옷을 추스르고 나오려는데 등위에다 대고 큰 소리로 “또 오세요.”한다. 매우 사무적인 간호사의 설레발은 병원 창구에서도 크게 들린다. 참 재미있는 간호사라고 생각하며 병원을 나선다. 차에 올라서 도서관 집필실로 가기 위해 주변 정리를 한다.
도서관 집필실을 들어오면 밤새 머물렀던 기운이 빠져나가도록 문을 잠시 열어둔다. 불을 켜고 창밖으로 보이는 남부시장과 시내 전경을 내려다본다. 이곳 완산도서관은 완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다. 도서관은 나에게 위로와 평안을 준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푸르던 나뭇잎들이 단풍이 들고 하나 둘 낙엽이 되어 덜어진다. 도서관 뒤뜰에 은행나무는 진노랑 카펫을 연출하고 있고 심술궂게 부는 바람에 떨어진 은행 열매는 어쩌다 발에 밟히면 툭 터지며 독가스를 내뿜기도 한다.
단풍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빛깔을 보여주는 완산칠봉의 매화봉 오르는 길은 매우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앙상한 가지로 남기 위해 나뭇잎을 다 떨구고 낙엽은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다가 구석진 곳에 쌓인다.
그나마 나에게 간택되어 내손에 들려와 책갈피처럼 눌러 놓은 단풍 든 낙엽은 이 겨울을 맞는 예술적 행위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네 삶은 예술적 행위로 승화되는 것이다. 세상살이는 늘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처음 본 듯 낯설어하는 경우도 있다. 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를 바랄 뿐이다. 계절을 따라 변하는 자연의 행위는 우리에게 진짜 순수함을 요구하는 줄 도 모른다. 일상의 여유를 따라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를 갖고 건강한 삶으로 이어가기 위한 모든 행위는 의미를 찾아가는 삶의 표현일 것이다. 순간순간이 이야기가 있는 삶이 된다면 생생한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다.
어제는 우리 손주들이 다 모였다. 색연필을 가지고 온 손녀딸이 나더러 종이를 달라고 했다. 책상 위 프린터 위에 있던 복사용지를 하나씩 나눠 줬더니 열심히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아이들이 정중동을 하게 된다. 큰 손주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무엇이니?. 나한테 설명해 줘 바?” 했더니 가을이라고 했다. 나름 창작예술로 들판을 표시하고 나무를 몇 그루 그려 놓고 단풍색으로 표현하여 “가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분명 가을을 표현한 것이 맞다고 생각되었다. 인생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그리는 그림처럼 남이 알 수 없는 창작의 세계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사람이 병을 앓게 되면 창조적인 삶은 살아갈 수가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당연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할과 과정이라는 숙제를 하게 되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신박한 그림을 그리듯 우리도 자신의 깊은 곳에 표현하지 못한 상념을 일깨워 보아야 할 것이다.
노인이 되어가는 길에서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미 어릴 적 경험했던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추억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아픈 곳이 생기고 즐거움이 줄어들면 사색하며 성찰하는 예술가적인 창의성은 아이들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나태하지 않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담아보는 행위가 필요할 것이다.
낙엽이 쌓여가는 오후, 숨어우는 바람소리처럼 그리움이 묻어오면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삶에서 예술적 혼을 담아보는 것도 소중한 가치로 만들어질 것이다. 단 한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어서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