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 편하게 살고 싶었다.
맘 편하게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게 살려면 역시 돈이 있어야 하고 힘이 되는 권력이나 명예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라도 막론하고 돈을 앞세우고 윤택한 생활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폼 나는 나들이를 하고 싶어 한다.
살다가 보면 가족들 간에도 제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경제적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로 사랑하고 내가 가진 것을 다 준다 해도 그것의 파이가 적을 때는 고마움보다는 불만스러운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편하게 산다는 것은 중요한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일 것이다.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힘이 원천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욕구는 좀처럼 포기하기 힘든 소중한 가치일 것이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으로서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내면에는 순전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공정한 환경을 부여받아서 출발하는 인생이 아니기에 가난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짊어진 부류들은 평생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힘이 든다.
우리나라 속담에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0세 아이들에게 커다란 부를 증여한다는 뉴스를 접한 바가 있다.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그라운드가 특별한 사람들은 절대로 작은 것 하나 포기할 줄 모르는 탐욕의 강함이 작용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공익과 공존, 공생과 공정이라는 말은 우리 세대는 물론 미래 세대에게도 공감을 갖지 못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대 전제를 주축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또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해 조금 손해를 보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좀 더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희생의 사랑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모두가 다 같이 추구한다면 나도 그들처럼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의 물질은 어떠한 나눔으로도 똑같이 나눌 수 없음은 신이 이 땅에 탐욕의 씨앗을 다 거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고급 가치를 생성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나는 빈곤에서 탈출하려던 시절에 가난한 아버지를 따라 살면서 소박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는 궁핍하지 않았다.
그때는 정이 있었고 나눔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더욱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빈부의 차이는 확연하게 구분되어 사회를 이끌어가는데 차별과 소외되는 실정이었지만 지금처럼 비참하게 느끼며 살지는 않았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세대는 다행히 빈곤에서 고통받았던 부모님 세대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먹고살만해지니까 또 다른 사회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
바로 윤리의식 수준이 낮아지고 도덕성의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느낀다.
존중과 배려, 신뢰와 섬김의 네 가지 가치가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그라운드에는 공유하는 가치보다는 경쟁심이 발동하여 관계를 해치고 있다.
서로가 공유하고 공존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무한경쟁이라는 현실에 지배되어 인간 본연의 도덕적 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돈이나 명예, 빛나는 삶의 소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투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비라든가 관용, 나눔과 배려가 없이는 결국 남을 해쳐야 한다는 극단적인 행위로 이어질 수 있어서 자칫 우리 사회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걱정도 갖게 된다.
나의 작은 생각들이 많은 사람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실천 덕목을 세워가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대 전제에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오늘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밥상을 감사함으로 받아서 먹게 되었다.
물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나에게 선한 마음을 담아 내어놓은 식사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 집의 아침 식사는 언젠가부터 간편식이 되었다.
아침밥을 안 먹게 된 지는 언제인지 몰라도 오래되었고 국이나 반찬들은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삶은 계란과 저지방 우유를 주전으로 토마토와 양배추와 당근이 포지션을 하고 있다.
바나나와 사과 반쪽, 때에 따라서는 떡이나 빵이 교체로 식탁에 들어오기도 한다. 또한 계절별로 제철 과일이나 채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조금씩 먹어도 상당한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오늘 아침 식단에 갑자기 빵이 들어왔다. 제법 유명한 빵집에서 구매했다며 내어 놓은 식빵이 내게는 너무 커 보였다.
빵과 특제된 쨈을 발라서 먹으면 맛이 특별하다고 소개해 주었다.
“너무 큰데 조금 잘라서 주면 안 될까?”했더니 아내가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귀찮은 듯 “먹고 남기면 되지!”했다.
전에는 그런 말을 들어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었다. 오늘따라 “남기면 되지”하는 말이 마음에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어쩜 처음부터 나를 생각해서 맛있는 빵이니까 많이 먹으라는 호의였을 거라 생각도 했다.
어제는 큰사위가 꽃게를 가져왔다. 싱싱하고 살이 꽉 차서 좋으니 맛있게 드시라고 가져왔다. 아내와 둘이 먹으라는 뜻으로 알았는데 크고 싱싱해 보이는 게를 몇 마리 따로 구분해 놓았다.
우리 먹으라고 가져온 것 중에서 좋은 것으로 손주들 주려고 남겨놓았다고 했다. 큰손주가 잘 먹는다는 것이다.
나와 둘이는 꽃게 다리가 끊어지고 왠지 상품성이 떨어진 듯한 것으로 내어 놓았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약간의 서운한 감정이 생기려고 했다.
넉넉하지 않던 신혼 때가 생각났다. 맘대로 먹을 것을 먹지도 못하고 돈도 풍족하게 써보지도 못했다. 못난 나를 만나서 돈벌이가 시원찮아서 많은 순간에 절제하고 때때로 포기하고 살아왔다.
그때는 최소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고 제일 먼저 챙기고 아껴주고 기다려 주는 내 몸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먹고 남기면 되지.”라는 말의 의미를 우연한 것처럼 찾아보고 싶었다.
퇴직을 하고 경제활동이 없어진 우리에게 “사랑”이란 단어는 퇴색한 듯하고 나보다는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집중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우리 가족 구성원 중에서 서열이 맨 뒤로 밀려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는 나를 그냥 습관처럼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우리 부부가 교회에서 만나서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 둘을 낳아 나이가 들어 출가시켰다.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우리 부부에게도 오랫동안 숨기고 살아온 추구하는 가치의 다름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며 세상의 가치보다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존중과 배려, 신뢰와 섬김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나눔과 배려의 가치를 더하며 살아왔다.
오늘 아침에 잊고 살아왔던 서로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의 차이가 새삼 분명함을 알게 되었고 아내의 말의 의미를 알아채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아내의 수고와 희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지나온 세월에 서운함과 미운 감정이 보이지 않게 자리하여 왔음도 짐작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라도 주변 사람들의 생활과 비교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나에게 맞춤형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이 지난한 세월에서 견디어 온 희생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잠깐 서운하게 들렸던 아내의 “먹고 남기면 되지!”라는 말이 그동안 배려하고 희생해 온 결과의 원망 섞인 표현이었다고 생각하니 내가 그동안 많이 미웠으리라 생각이 된다.
결국 나도 살아오면서 도덕적 관점에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꿈꾸어 왔으나 돈과 권력, 명예에 온전히 견지하지 못했다는 미련도 남는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마음 깊이에서부터 표출되고 있지만 어디에서부터 인지 잘 맞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혼란스러운 일상에 불편한 심리를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