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이 품어 준 역사이야기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으나 아침 일찍 내장산 트레킹 길에 나섰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 덮었고 간간이 구름사이로 햇살이 내리고 있다.
어디에선가 예초기로 풀 베는 작업을 하는지 진한 풀냄새가 번져온다.
길게 늘어지는 몇 안 되는 매미소리는 마지막 여름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지난 수요일에 가기로 했던 산행이 금요일인 오늘로 미루어진 것은 서로 한 번씩 선약을 핑계로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내장산 매표소 입구 나무그늘에 주차를 하고 작은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어제도 소나기가 내려서 인지 습기가 가득 찬 숲길에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금세 땀이 맺히고 늘어난 계곡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나무밑둥지에는 애기고깔버섯, 땅에서는 갈색고리갓버섯, 노란 느타리버섯, 낙엽버섯 외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버섯들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가든길을 멈추고 버섯들을 사진에 담아서 멈춰주지 않고 걸어가는 친구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주황색의 제주상사화는 여름이 가는 길에 산행객 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명서가 지난주에 내가 물어봤던 내장산 원적암과 은적암의 구분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원적암은 내장사 대웅전 오른쪽 계곡을 따라 우리가 늘 걷던 길 끝에서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작은 암자이고, 은적암은 용굴을 지나 오르는 곳에 있는 오래된 암자로 지금은 터의 흔적만 있다고 했다.
내가 자료를 정리하다가 정읍에 사는 명서에게 물었더니 조선왕조 실록은 용굴이라는 곳에 보관되었었다고 했다.
자기도 자세히 모른다며 그곳에 가보자고 했다.
용굴로 향하는 길은 내장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내장사 대웅전은 두 개의 계곡이 합하는 곳 바로 위쪽에 자리하고 있음도 오늘 알 수 있었다.
입구에서 벌써 용굴암이라는 길이 이정표로 소개되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 이안길이라며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장산을 그토록 많이 다녔으면서도 이 길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다.
원적암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서 주로 그 길을 가게 되었다.
용굴로 가는 길은 자갈길로 자연 친화적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중간중간에 데크길을 만들어 놓아서 탐방로로는 손색이 없었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벌써 땀이 온몸에 흥건하게 흐르고 있었다.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은 시원하기보다는 차갑게 느껴졌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에 담을 훔치고 목에 거니 시원함이 최고였다.
습기가 많은 곳이라 물봉선화 붉은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빨간 여뀌꽃도 치어 있어서 자연 식물도감을 보는 듯하였고 곧 비가 내릴 듯 습한 기운이 말길을 무겁게 하였다.
내장산의 9개 봉우리 중 신선봉으로 이어진 길에 <용굴>이라는 작은 바위굴이 있다고 했다.
<용굴>은 임진왜란 때 전주에 있는 경기 전 참봉이었던 오희길이라는 사람이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전라감사를 대신하여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눈을 피해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피란시키기로 결정하고 태인현에 있는 손홍록을 찾아가서 상의하고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조금 올라가 이안길을 모형물로 재현해 놓아서 이 길을 따라 실록을 옮겼을 당시의 사람들의 숨 가쁜 현장을 보는 듯했다.
소의 등에 싣고 사람들이 봇짐으로 이고 지고 올랐던 이안길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조선의 25대 472년의 왕의 행적과 당대의 정치외교 행정전반 및 문화와 예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방대한 규모의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록물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이안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제1 이안길, 제2 이안길, 제7 이안길로 이어지며 중간중간에 당시 실록을 옮겼던 사람의 모형과 조선왕조실록에 애한 설명을 표지판에 기록하여 설명해 주고 있었다.
108개 계단을 올라서 용굴에 도착하게 되었다. 잠시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작은 돌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쉼을 청했다.
지금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그나마 쉽게 올라올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가파르고 미끄러운 험난한 길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 올라와서 바라본 용굴 안에는 어둡고 침침하기마저 했다. <용굴>이 영험함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갖가지 신의 가호를 비는 사람들의 기원하는 형상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협소해 보이는 굴은 간신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정도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에서 최고의 안전한 장소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에 은적암으로 옮겨진 실록은 어진과 함께 더 깊숙한 바래 암으로 옮겨졌으며 370일 동안 내장산에 보존되었다고 했다.
나라를 사랑하고 조선의 기록물을 보전하여 후세에 이어 주기 위한 선조들의 역사적 사명 같은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온전히 느껴보는 계기가 되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르는 이가 몇 명 더 있었지만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려오는 길을 재촉했다.
조금만 더 오르면 은적암 터에까지 이를 수 있었는데 다음을 기약하고 내려왔다.
비가 점점 더해지기 시작했다.
오르는 길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나는 명 서와 역사적 사실의 더듬이를 통해 의견을 나누며 힘든 여정의 길을 다시 걷게 됨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계곡물이 작은 바위를 타고 돌아 내려오는 모습이 아직도 숨차게 오르던 실록을 옮기던 사람들의 숨소리처럼 들려왔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내장사 대웅전 앞 뜰에 도착하니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차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족히 30분은 걸어야 했다.
우거진 나뭇가지 아래로 급한 비를 피하며 해찰하지 않고 내려왔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는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트레킹 길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용굴>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 오늘의 최고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정읍에는 여러 가지 역사의 흔적들이 많은 지역이다.
학문을 사랑하고 풍류와 맛과 정이 서려있는 정읍에는 내장산의 기운으로 흐트러짐 없이 유지 보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높은 산이 있기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은 맑은 천이 있고 보존되어야 할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가까이 있는 맛집을 찾아 점심을 해결하고 비도 오는데 짬을 내서 역사문화 탐방에 나서보자고 하는 친구의 안내를 받아 순창 쌍치로 차를 몰았다.
쌍치의 지명 유래는 예전에 군대의 설치를 이르는 상치와 하치를 이르며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우리는 정읍 내장산을 이어 붙인 순창 쌍치에 있는 훈몽재를 찾았다.
훈몽재는 조선중기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인종의 스승이었던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때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당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전라북도지정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몇 차례 옮겨 복원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근처에 지금의 훈몽재를 복원하였다고 현재 훈장으로 계시는 정읍의 서예가 지암 류승훈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다도를 하시는 훈장 선생님께서 직접 내어주신 차를 마시고 댓돌에 발을 내리니 앞에 드리워진 산마루에 비구름이 걸쳐 있어 운치를 더했다.
자연풍광이 훌륭한 이곳 훈몽재 옆으로 하천 추령천을 따라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내장산 최고봉인 신선봉 뒤쪽 복흥 구암사 안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훈몽재 앞쪽을 흘러 정읍 산내면의 옥정호로 유입된다고 한다.
약 1.2km의 데크로드 산책길을 선비처럼 걸으며 정비되지 않은 천의 자연미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데크로드 산책길 끝 정자 사과정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 나왔다.
이곳 훈몽재는 일반인들도 수학을 하고 심신수련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방을 내어주신다고 했다.
나는 다음에 이곳에 와서 훈몽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고찰하고 끊임없이 학습하는 습관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는 바람을 앞세우고 지나갔다. 습기가 에워싼 또 하나의 역사문화의 현장 훈몽재에서 선비의 기운을 느끼고 정읍으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