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남

살림은 연습 없이 실행해야 한다.

by 이광주

살림남이 되었다. 졸지에 떠안은 살림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은 살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을 때 하는 투정이다. 이런 걸 들어주거나 위안을 받을 처지도 아닌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아내는 무책임의 극치다. 난 직장생활 인사이동으로 자리 옮길 때마다 인계인수는 필수라고 몸에 밴 사람이다. 살림 인계인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한마디 언질도 없이 떠나버렸으니 무책임한 사람이라 원망 들어도 할 말 없을 거다. 삼시 세끼는 어떻게, 각종 양념은? 세탁은?, 은행거래는…?

당신도 한 번 당해보라는 거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긴 당해도 싸다 간이 맞다 안 맞다.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으냐 잔소리만 했지 도와준 적 없이 여자 일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얄미웠던 게야.

무에서 유를 개척하는 살림을 할 처지다. 하기야 아내인들 처음부터 살림을 알고 했겠는가. 밥솥에 손 담가 밥물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간 몸에 익힌 덕에 뚝딱 만들어도 최고 요리사 뺨칠 경지에 이르렀겠지. 불평하는 건 내 무능력의 고백이니 자취생 기억 되살려 해 보는 거지 뭐.


잠자리에서 눈뜨는 순간 내 살림이다. 하루는 오디오를 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날 기분에 맞는 곡을 선정하여 집안을 휘감아 분위기를 조성한다. 창문 열고, 침대 정리하면서 일정을 생각한다. 이불 걷어 올리고 찍찍이로 시트 위 먼지 제거한 다음 시트를 팽팽하게 당겨 호텔 방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상큼한 느낌이 나도록 해 놓는다. 잠자리에 들 때 대우받는 나를 위함이다.

그리 침대를 정리하고 나면 섬뜩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중환자실 누워있던 환자가 갑자기 떠난 뒤 정리된 병원 침대가 눈에 아른거려서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침대 주인을 생각하며 팽팽하게 당겨진 하얀 시트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날도 많다. 오디오가 다음 곡으로 트랙을 바꿔 분위기를 전환한다.


지난밤 잠자리에 누워 오늘 세끼 먹거리 구상을 했었다. 아내는 어떻게 수십 년간 메뉴도 없이 때만 되면 척척 음식을 만들었을까. 살림남이 제일 어려운 건 삼시 세끼 해결이다. 밥걱정은 없다. 쿠쿠 비서가 해결해 준다. 軍 시절 식사 기본은 1식 3 찬. 기준이 머릿속에 있는데 실행하기 쉽지 않다. 영양가, 건강 식단 이런 걸 따지기는 버겁다. 생계형 식사 해결이 과제다. 급할 땐 경험치가 답이다. 자취생 라면에 찬밥 말아먹기, 어릴 적 할머니가 뜨거운 밥에 날달걀 넣고 참기름 한 방울에 왜간장으로 비벼주던 고소한 밥….

요즘은 너튜브 요리선생을 불러 개인 교습을 받는다. 그 덕에 콩나물국, 김치찌개 정도는 거뜬하게 해결할 수준이 되었다. 난제는 간 맞추는 일이다. 요리별 국간장, 진간장, 양조간장, 맛간장….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요리는 요리사에게!

먹는 건 그럭저럭 꾸려간다. 살림은 끝이 없고, 폭이 너무 넓다. 쌓여있는 세탁물 처리도 미룰 수 없다. 그것도 과외 선생이 필요하다. 유 선생한테 물어본다. 세제, 유연제 몇 밀리씩 넣어야 하는지. 시시콜콜한 것도 잘 알려주는 친절한 선생이다. 세탁기 돌아가는 동안 베란다 화분을 살펴본다. 물 줄 때가 되었는지 겉흙을 살펴보고, 누런 잎도 떼어낸다. 일일이 손이 가야 화초도 잘 자란다. 분리수거, 방문소독 오는 날, 가스사용량 검침 기록 등등 표시 안 나는 일이 끝이 없다.


오늘 홍 선생과 점심 약속이 있다. 외출복 고르기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색상 매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저것 맞춰봐도 영 아닌 것 같다. 아내가 골라서 코디해 주던 때 신경 써 배워둘 걸 후회가 된다. 여행 갔을 때 촬영한 사진을 뒤적인다. 사진 속 색상 매치를 흉내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다. 어설프긴 해도 머플러도 골라 매고 끌밋하게 준비를 끝냈다. 사정도 모르고 멋쟁이란다. 이렇게 식사라도 함께하는 동안은 살림남에서 벗어났다는 여유로움이 좋다.


집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본분으로 돌아와야 한다. 외출복은 먼지 털고, 구김 펴지도록 스프레이 분무해서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쳐 건조대 걸어 놓아야 외출 마무리가 된다.

하루는 청소를 끝내야 종료다. 청소기 돌리기 전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 재고를 확인한다. 샐러드용 야채, 과일 등 부족한 건 새벽 배송시키고, 반찬 가게에 들렀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찬가게 예쁜 아주머니는 단골인 내 취향과 반찬 재고를 훤히 꿰뚫고 있다. 멸치볶음하고 연근 조림 다 드셨지요? 이번 주엔 홍어 무침, 코다리 조림에 봄기운 나게 나물 드셔보세요. 척척 알아서 몇 가지 포장해 준다. 오이소박이 몇 개를 덤으로 주는 후덕함도 있다. 냉장고 반찬 정리하다 말고 주저앉았다. 샐러드에 넣어 먹으려 사다 놓은 통들깨 통을 떨어트려 주방 전체에 흩어졌다. 알갱이가 틈틈이 안 끼인 곳이 없다. 허리 굽혀 줍다 화가 나더니 설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났다. 이러는 게 너무 싫었다. 냉장고 문을 거세게 닫았다.

긴 한숨 뒤. 청소기 돌리고 마대 걸레질 끝내고 나서야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다. 하루가 쉼 없이 바쁘게 돌아갔음에도 무언가 덜 한듯한 찜찜함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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