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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비 Oct 18. 2022

우울한 사람의 일기 훔쳐보기

우울한 날은 어제도 오늘도.

어젯밤 정체는 알지만 그 크기가 너무 비대해진 슬픔에 짓눌렸다. 옛 기억이 밀려와 내가 마음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웠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는 나를 향한 자책이 실려있어 더 가슴이 아프다. 엄마 생각을 더 하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 그만뒀다. 밀려오는 슬픔과 피곤함에 나를 놓아주고 다 떠밀려 내려와보니 아침이었다. 


아침을 그리워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일까 태양을 향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무리 슬퍼도 맑은 아침 햇살은 마법과 같이 주문을 건다. 오늘은 화창한 날이다. 너의 마음도 화창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항상 그 마법에 빠지는 나는 희망찬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주 1회 오전마다 줌으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낭독한다. 페미니즘 고전은 현실에서 닿지 못하는 이상을 외치지만 망가진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는 한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어야 하고 그 세상을 상상함에 있어 너의 사고를 확장시키라고. 한번 확장된 사고는 30평짜리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청년처럼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동반한다. 반드시 더 괜찮은 세상을 꿈꾸겠다고. 다시는 과거로 후퇴하지 않겠다고. 그 마음을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 행복했다. 마음이 많이 들떠버린다. 


그래서일까. 그 사람을 보러 나서는 발걸음도 무겁지 않았다. 어서 해치워 버리고 싶은 숙제 같이 느껴졌는데 오늘 딱 숙제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를 받으러 가는 마음이었다. 

왜 그렇게 가기 싫었을까? 내 연락에 답장하는 성의가 없어서? 그의 데면데면한 마음을 너무 잘 읽어버려서? 과거의 끈을 억지로 이어 붙여 현실로 끌어당기는 노력이 가짜 같아서? 아니면 그를 향한 헛된 마음이 생겨버려 내 현실을 괴롭게 만들까 무서워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만나기 싫었는지. 과거의 누군가를 만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그 안에서 시시껄렁한 추억을 뒤집어 전시하고, 그 과거의 서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평가하는 모습이 불편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거의 ‘누군가’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아 요동칠 나의 감정과 마음이 너무나 선명히 보여서, 그리고 그 미래가 걱정스러워 그럴 수도 있다. 

내 존재는 단단한 벽돌 같다가도 모든 것에 섞여버리는 물처럼 변하기도 해서 온전히 내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상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와 섞여버릴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온전한 나의 모습은 홀로 서 있는 모습이라는 걸까. 철저히 고립되어야 나 자신일 수 있는 벽돌 같은 존재. 바로 내가 그렇다. 

아니,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태라서 그렇다. 물이 조금만 불어나도 금이 가 터져버릴 수위의 마음이 위험한 상태라서 그렇다. 이런 내 마음에는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안된다. 단지 잔잔한 호수 위로 맑은 햇살이 지속되는 날씨여야지 산다 내가. 

나는 위험한 상태니까.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일단 도망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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