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를 끓이고 마셨다. 짐승일기의 마지막 장을 읽었다.
사발에 차를 부으며 투명해진 찻물을 보았다. 분명 아직 색은 있는데 투명하다.
보이차는 불투명하고 색이 진한, 그래서 사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할 때 가장 맛있다. 그 맛은 차를 두 번, 세 번 끓이면 끝이 난다. 그리고 다시 투명한, 하지만 어두운 찻 색이 분명한 찻물로 돌아간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액체는 투명한 상태가 원점이니 돌아간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것을 불투명하게, 특징이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대게 고체일 테니까. 보이차 안에 들어있는 보이 찻잎 처럼.
내 인생은 투명한 시기로 진입한 것 같다. 진입했을까?의 의문이 아닌 마침표의 확신 같은 시기다. 삶의 고체 덩어리가 무엇이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명해졌을까. 투명하면 맛이 없는데.
맑아진 보이차를 마실 때마다 생각한다.
그럼 왜 계속 마셔?
그냥 마셔지니까 계속 마신다. 목이 마르니까. 마시고 싶으니까.
더 이상 맛있다의 개념은 없고 마신다의 개념만 남는다.
맛있어야만 마시는게 아닌 것을 나도 안다. 마실 수 있음에 다행이었던 순간도 많으니까. 맛있는 보이차를 마시겠다는 아침의 의지는 그 맛이 끝나도 영 사라지지 않고 마시게 만든다.
투명해진 것들이 그렇게 아침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