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토아주의와 에피큐로스주의의 행복론

행복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

by 이종철

내가 올 겨울에 차 때문에 애를 많이 먹고 있다. 기본적으로 연식이 오래된 차에다가 올 겨울 혹한이 심한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수시로 일어나는 밧데리 방전으로 긴급 출동을 불러 해당 회사의 서비스 센타에 네번 씩이나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 더 크다. 아무리 힘든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 덜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문제가 반복이 된다면 고통이 배가될 수 있다. 내가 이번 겨울에 자동차 문제로 겪는 고통이 그와 똑 같다.


살다 보면 어디 자동차 문제 뿐이겠는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문제 투성이 이고, 그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가 겪는 마음은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취업해서 일을 하는 문제, 경제적 빈곤과 육체적 고통의 문제, 인간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 사회나 국가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 자연 재해와 기상 이변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얼마든지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우리 생명이 다해야만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도 삶을 고라고 하고, 이 고통의 바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가를 모색하고자 했다. 부처는 이 고를 크게 생노병사와 같이 생물학적 의미에서만 파악했지만,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도 크다.


그런데 이런 문제와 고통이 발생할 때마다 일희일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런 고통을 억지로 회피하거나 도망가려는 것보다 그 고통이 우리의 희비애락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고통의 원인과 그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결과 사이의 인과 관계의 고리를 이성적으로 안다면 그것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고통이 전달되는 채널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훨씬 더 고통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아주의자들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 고통의 인과 관계를 차단함으로써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대한 로마 제국에서 노예적 삶을 살았던 경우가 많다. 그만큼 현실에 대한 좌절과 무력을 느끼고, 고단한 삶의 강제로 인해 고통을 누구보다 많이 겪은 사람들일 수가 많다. 도대체 이 거대한 국가 시스템 하에서 무력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는 이런 거대한 제국을 바꾸려 하기 보다는 그 제국이 나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들에게는 폴리스의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긍심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외부에 대한 나의 대응방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내면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자 했다. 그들이 철학을 한 것은 그리스 인들처럼 폴리스에 참여해서 폴리스에 무언가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나 국가가 자신의 삶에 개입해서 변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희노애락의 감정은 늘 외부에 원인이 있다. 기쁨이 있으면 기뻐해야 할 원인이 있고, 슬픈 원인이 있어 슬픈 것이고, 고통스러운 원인이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원인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파토스(Pathos)이다. 파토스는 수동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작동은 항상 외부에 원인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 이성은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이성은 합리적 판단에 의해 수동감정의 창구를 닫아버릴 수 있다. 가령 낯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뺨을 맞으면 화가 날 수가 있다. 혹은 가을 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다 보면 슬플 수가 있다. 이 둘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외부 원인에 의해 수동 감정이 움직이는 경우이다. 하지만 돌이 낙하하는 기계적 운동을 보고 슬프거나 기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만약 모든 것을 이렇게 기계적인 인과 관계로 생각한다면 굳이 슬퍼하거나 기뻐할 필요가 있겠는가? 능동이성은 얼마든지 이런 인과관계의 원인을 깨닫고 그것을 차단함으로써 내면의 정신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하는 아파테이아(a-pathetia)가 바로 그러한 경지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수동 감정(Pathos)을 차단함으로써 내면의 행복과 평화를 지향하고자 한 것이다.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그들은 쾌락을 선으로 보고, 고통을 악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참된 목적으로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쾌락이다. 나중에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자들이 추구한 쾌락을 돼지의 쾌락이라고 비판한 밀의 질적 쾌락주의와 마찬가지로 에피큐로스주의자들도 내면의 정신적 추구를 참된 쾌락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말하는 쾌락의 최고 경지는 아타락시아(ataraxia)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어느 것에 매이지 않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평정 속에서 누리는 쾌락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in Zarathustra)의 ’정신의 변화‘라는 장에서 말했듯, 인간 정신의 최고의 단계는 아이들이 하는 ‘놀이의 정신’이다. 아이들은 어떤 틀이나 이념에 매이지 않고 그 자체를 즐기는 데서 기쁨을 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지극한 정신의 경지는 누구가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행복에 가장 큰 방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유한한 인생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고통이다. 이 죽음에 대한 공포야 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에 가장 큰 장애로 본 것이다. 그래서 에피큐로스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논리적으로 비판한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었다고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에피큐로스의 논변 덕분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죽음은 이미 온 것으로 인해 두려운 것이 아니고,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은 아닐까?


한국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부와 경제, 외모와 이미지 등 외부적 조건에 노출되어 있고 또 그것들의 영향에 민감하다. 그것들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내면의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스토아주의자나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의 지혜가 요구된다할 것이다. 반면 스토아주의자나 에피큐로스주의자는 이런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는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적 행복관과는 다른 근본주의적 성격도 강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텔리겐차와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