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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Aug 19. 2023

왜 한국인들은 공부를 지겨워 하는가?


Why Koreans? 시리즈 1탄



공자는 평생을 배우는 것을 즐겨했다. <논어>의 맨 처음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중시했는 지 알 수가 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아니 기쁠소냐.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너무나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논어>를 읽다 보면 이런 구절이 아주 많이 나온다. 세 사람만 가도 반드시 그 중에는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고 하고, 배우는 데 늘 민첩했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敏而好學 不恥下問)고도 한다. <논어> 술이편에 보면 발분망식(發憤忘食)이란 말도 나온다. 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밥먹는 것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학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편이지만 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배움과 탐구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일본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3국이 근대화를 빠르게 달성할 수 있었던 데는 유교 문화권에 있는 이들 국가들의 높은 교육열이 밑바탕이 되었었다. 이로 인해 '유교 자본주의'라는 신조어까지 생기기도 했다.


조선 왕조 5 백 년은 유교, 좀 더 정확히는 성리학이 지배했다.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을 세웠고, 그 이후 유교는 나라의 동량지재를 선출하는 과거 시험을 통해 교육 과정 전체를 이끌었다. 양반 집 자재는 걸음마를 제대로 하기 전부터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天地玄黃)를 외우고 좀 더 성장하면 소학과 명심보감을 배우고, 점차 4서 3 경을 외우다시피 열공 했다. 그만큼 유교는 조선 조 5백년 동안 지배적인 통치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면서 양반 집 자제와 사배부들의 공부를 자극했다. 이런 높은 교육열 덕분에 20세기 들어 일제 식민지 체제를 경험하면서도 독립을 꿈꿨고, 해방과 남북 전쟁을 겪으면서 초토화된 나라를 빠른 수준으로 근대화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의 교육 열이 대단히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한국인들은 공부를 지겨워 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시키는 공부는 잘할 지 몰라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공부는 거의 제로 상태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들이 하는 공부는 대개 입시와 학업을 위한 타율적인 공부였다. 거의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이런 공부에서 낙오할 경우 인생의 루저(looser)가 된다는 강박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할 수 없이 부모가 강요하는 공부를 했다. 이런 공부는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해서 대학 입시를 통과하기 전까지 중고등학교에서 줄 창 이어지지만 정착 가르키는 선생은 사교육을 담당한 학원 선생들이다. 입시 공부의 강도가 워낙 쎄다 보니 외국인들은 한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단기간의 학업 성취에는 이런 식의 공부가 효과를 낼 수가 있다. 하지만 반 강제적인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지옥 경험처럼 느껴질 뿐 배우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경험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공부를 하는 대학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학점을 따는 공부는 열심히 할 지 몰라도 기초 과학이나 인문 교양 등 창의적인 공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외면한다. 이런 현상은 외국에 유학을 간 학생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지 교수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한국 학생들에 대한 평가는 요약 정리는 잘 하지만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저 타율적으로 주어진 과제를 암기하는 교육에 익숙하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찾아가는 능력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대학의 문을 벗어나는 순간 더욱 심해진다.


한국인들의 독서량은 이웃 일본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출판 산업은 대표적인 사양 산업이 되고 있을까? 한국인들의 독서는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그만 땡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거의 몸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고, 업무와 관련된 경우 아니면 책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술 마시고 노래 방 가는 시간과 비용에 비하면 책을 사서 읽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생활을 5년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졸업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거의 없어진다. 그럼에도 대학의 학벌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무시 못할 징표이다. 사회에서 이렇게 수 십 년 생활하다 보면 인생 살아가는 요령만 늘 뿐 거의 깡통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경우는 특수한 경험을 하거나 공직자로 지냈던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분야에서 수 십 년 동안 경력을 쌓았으면 그 분야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술 먹고 오로지 인맥으로 승부를 거는 사람들에게 그런 달인의 경지는 언감생심이다. 그러다 보니 퇴직 후에도 현직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살아있는 경험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다.


공부는 타율적으로 시작할 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문제 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공자도 말씀했듯,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논어>, 옹야(雍也)이다. 공부의 최고봉은 자기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파고 드는 것이고, 그런 행위를 고역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마치 아이가 모래 사장에서 집짓는 놀이를 하다가 파도가 밀려와서 그 집을 허물어 버려도 울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과 똑 같다. 창의적인 학자나 예술가들 중에는 이런 식의 공부에 미친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즐김과 기쁨을 공부하는 데서 경험해야 비로소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경우가 많다. 2022년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할 펄즈 상을 탄 허 준이 교수는 서울대 학부를 무려 6년 만에 졸업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학습 지진아 수준이라고 하겠지만, 학점 따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공부하다가 나타난 현상이다. 그의 경우를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 지는 알 수가 있을 것이다.뒤집어 생각한다면,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 열은 오히려 창의적인 공부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런 교육은 대부분 강제적인 입시 교육이고, 그것을 해소시켜 주는 것은 문제 풀이 선수들인 학원 선생들이다. 그러니 요령만 배울 뿐 참으로 공부의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이런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공부가 얼마나 지겹겠는가? 그들에게 학교를 벗어나는 순간은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의 순간으로 간주된다. 한국인들이 공부를 지겨워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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