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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Aug 19. 2023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무례한가?

Why Koreans? 시리즈 2탄



얼마 전 학부모의 간섭과 모욕으로 꽃 다운 교사가 자살을 했는데, 이번에는 군수 참모처장이 병사들을 일꾼 다루듯 하면서 16첩 밥상을 내어 지인에게 대접을 했다고 한다. 다른 어느 곳보다 공사가 분명해야 할 군대에서 남의 귀한 자식을 노예처럼 부려 먹은 셈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그동안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예들을 거론할 것도 없이 이제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차별'이라는 말이 한국인들의 일상이 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나보다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아파트 평 수가 작다고 무시하고, 사는 동네가 꾸질하다고 무시하고, 가방끈이 짧다고 무시하고, 지잡대라 무시하고, 직업이 천하다고 무시하고, 업무 처리가 늦다고 무시하고, 키가 작다고 무시하고, 못생겼다고 무시하고, 장애인이라고 무시하고, 동남아 출신이라 무시하고 정규직이라고 강사를 무시한다. 이런 모욕과 무시가 이제는 학교 현장에서도 빈발해서 선생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은 자기보다 조금만 못해도 무시하는 것이 몸에 밴듯하다. 도대체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무례해졌는가? 한국인들이 도덕 교육이나 인성 교육이 잘 못 돼서 그런가? 한국의 가정 교육이 잘 못 돼서 그런가? 한국인 자체의 인성이나 사회 자체가 태생적으로 잘 못 돼서 그런가? 모욕과 무시는 선진 외국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물타기를 하지 마라.




이조 5 백 년 동안 조선은 유교가 지배해온 국가이다. 잘 알다시피 유교는 다른 무엇보다 예(禮)를 중시한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은 3가지 강령과 5가지 인륜을 말한다. 여기에는 군주와 신하 간 , 부부 간, 아버지와 자식들 간, 친구들 간 등 거의 인간 사회 모두에 적용되는 도리와 예법을 지정해 놓고 있다. 부모가 죽으면 3년 상을 치루고, 조상을 섬기는 제사를 지낼 때 차례 음식 상 놓는 법도 다 규정하고 있다. 17세기 조선에서 벌어진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이런 예법이 현실 정치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했다. 이는 효종이 죽은 후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기년복(朞年服)을 입을 것인가, 3년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다. 효종은 둘째이기 때문에 기년 상을 치뤄야 겠지만 동시에 왕이었기 때문에 3년 상을 치뤄야 한다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인 논쟁이었다. 이만큼 조선 5백년 동안 조선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강력하게 규율해왔던 예법 덕분에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렸는 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오늘 날에 와서 깡그리 사라지고 있을까? 한국 사회가 지난 1세기 동안 근대화 되면서 전통 예법은 사라지고 새로운 규범을 마련하지 못하다 보니 도덕 규범의 공백 현상, 말하자면 일종의 아노미(anomie)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야 할 규범이 무엇일까?




서구인들도 중세 천 년을 지배했던 가톨릭이 종교 개혁으로 무너졌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가톨릭은 개인의 신앙 보다는 엄격한 예배 의식과 사제, 그리고 교회 제도에 기초해 있다. 중세 후반 가톨릭이 면죄부까지 판매하면서 타락하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도하면서 프로테스탄트를 제창했다. 개신교는 사제나 교회를 배제하고 오로지 믿는 자의 내면의 양심을 통해 신과의 만남, 믿음을 강조했다.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데카르트의 Cogito의 확실성(Gewwisheit)와 마찬가지로 양심(Gewisse)은 내 마음 속의 자기 확신에 기초한 도덕율이다. 이런 내면의 양심이 사제와 교회를 대신해서 새로운 신앙의 준거 역할을 하고 도덕적 인간의 도덕율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인들이 아노미(Anomie)의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신과 교통하는 내면의 확실한 양심 때문이다. 이 양심은 기존의 규칙이나 의무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헤겔이 말하듯, "양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의 힘 속에서 마음대로 묶고 풀 수 있는 절대적 자주성의 위엄을 지닌다."(Hegel, <정신현상학>) 각자가 마음 속에 신을 모시고 있으니까 타인을 '목적의 왕국'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인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 5 백 년을 지탱해왔던 타율적인 유교의 예를 집어 던졌지만 서구인들처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내면의 도덕율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성과 경을 강조하는 유교가 타율적인 예법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나 법 같은 근대화의 외면을 모방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내면의 신앙, 양심적 도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교회가 그렇게 많이 외형적으로 성장을 했어도 내면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다 보니 교회가 한국인들의 도덕과 정신 형성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는 천민 자본주의와 탐욕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역할을 더 많이 했다. 한국인의 정신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오로지 화폐 신(Money God) 뿐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가 한국 사회다. 때문에 부가 축적이 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차별은 이런 천민 의식이 표출될 수 있는 하수관이나 다음 없이 되었다. 잘못된 행동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양심도 없고, 그것을 외부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법이나 도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다 보니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자를 보면 하대하는 태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이제 새로운 도덕율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유교의 성(誠)의 윤리이든, 기독교의 양심(Gewisse)의 윤리이든 자신의 내면의 확고한 도덕율이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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