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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Aug 19. 2023

왜 한국인들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한가?


Why Koreans series 3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고래가 춤을 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겠지만, 칭찬은 그만큼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을만한 힘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남을 칭찬하는 법이 거의 없다. 오히려 남을 깍아 내리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 '헬 조선'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이 이런 분위기에 기인할 것이다. 도대체 한국인들은 왜 그럴까?




칭찬을 하면 좋은 점이 많다. 일단 상대에 대한 긴장을 풀어줄 수 있다. 서로 간에 경쟁을 하다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스트레스도 심해진다. 이럴 때 상대의 아주 자그마한 점이라도 칭찬을 해주면 당장 효과가 있다. 어떤 사람도 칭찬을 받고 싫어하거나 웃는 낯에 침을 뱉는 경우는 없다. 칭찬으로 누그러지면 죽고 사는 식의 경쟁 분위기도 선의의 경쟁으로 바뀔 수 있다. 상대를 꼭 죽여야만 이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칭찬은 좋은 인간 관계의 강력한 도구이다.




sns에 글을 쓰다 보면 댓글이 달리는 데 아주 심한 악풀이 달리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사람들은 이런 악풀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도 받고, 심지어 대중의 칭찬을 먹고 사는 연예인들의 경우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다. 굳이 상대의 복장을 긁어 놓을 필요가 없는 데 오히려 이런 행위를 즐겁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 중에는 전문적으로 게시판을 찾아다니면서 악성 댓글로 글쓴이의 감정에 비수를 날린다. 아주 좋지 않은 행동이다. 오죽하면 선풀 달기 운동을 하거나 실명제로 전환해서 함부로 악풀을 달지 못하도록 하겠는가? 억지로 선풀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재미로 하는 악풀은 상대를 죽이는 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대부분은 상대 정당의 행위나 상대 의원들의 말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정당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이런 비판을 통해 개선과 성장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비판이 아니라 오로지 비난을 위한 비난을 일삼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서로 간에 경청을 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는 국민들도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로 간에 귀를 닫고 오로지 입만 열면 비난을 하기 때문에 한국 정치의 발전이 쉽지 않다. 말이 씨가 된다고 오로지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산다는 비장한 감정이 앞서다 보니 정권이 바뀌면 전정권의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기 일쑤다. 이런 형태의 단순 뒤집기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부정으로서 더 이상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변증법에서 '지양'(aufheben)이란 말은 부정하고 비판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좋은 것을 보존해서 끌어 올리는 긍정적 의미도 담고 있다. 단순 부정으로서는 이런 형태의 지양이 불가능하다. 정치인들의 이런 언어는 이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일상화돼서 굳어진 한국 사회의 진영논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진영 논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한국에 대한 전망은 참으로 우울해질 것이다




무조건 비난이라 하면 언론도 빠지지 않는다. 언론의 칼럼은 일반 국민들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때문에 이런 칼럼을 쓰는 인사들은 개인적이거나 정파적인 입장을 넘어서 보다 객관적이고 전체를 고려해야만 한다. 오늘 날 언론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공식적 권력 외에 언론 권력이라 할만큼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언론이 정파적 입장을 고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한국의 언론들은 특정 정당 기관지나 선전지라 오해 받을 정도로 편파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지수가 땅에 떨어져 있는 편이다. 언론인들의 자질 개선이 필요할 정도이다. 여기에는 미디어 환경이 달라진 면도 크다. 특히나 오늘 날에는 sns의 발달로 검증되지 않은 편파성 글들이 언론의 이름을 걸치고 도처에 넘치고 있다.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데는 이러한 다양성이 필요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물어야 할 것이다.




남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기로는 한국의 학자들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이든 남을 인정하지 않는다. 학자가 논문을 쓸 때면 다른 논문들이나 책들을 읽어야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설령 읽었어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게다가 인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국내 학자의 글을 인용할 경우 가산점을 준다는 학술진흥재단의 권장 기준이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외국의 문헌들은 수도 없이, 거의 절대적 신뢰를 갖고 인용을 한다. 어떤 경우는 번역서를 읽고서도 인용은 원전 페이지를 인용하기 까지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상당 부분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성이 없기 때문인데, 이런 태도가 조선의 중화 사대주의 이래로 일제의 식민지를 거쳐 해방후 친미 사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학문 사회도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비판해가면서 동반 성장할 수 있지만 이렇게 준거점을 외국에 두다 보면 학문의 자생적 논쟁이나 발전이 있기 힘들다. 오늘 날 한국에 수많은 논문들이 쏟아져도 세계적인 담론이나 이론 혹은 철학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들은 다른 어떤 나라의 국민들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자존심은 배타적 감정에 기초할 수 있고, 때문에 칭찬에 인색한 태도는 이런 감정에 기초해 있을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 자신을 존중하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일 수록 타인에 대한 인정도 후하고 타인을 칭찬 잘 한다. 상대가 아무리 나와 적대를 이룬다 해도 상대를 인정할 때 나 자신도 인정 받을 수 있다. 이런 인정에는 칭찬이 절대적이다. 무조건 단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긍정적인 면도 확인하고 칭찬할 수 있는 대인의 풍모와 자세가 이 시대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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