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간만에 명상을 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가만히 감는다. 호흡을 서서히 가르면서 생각을 모은다. 그런데 단 5분도 지나지 않아서 허리가 아프고 다리도 땡긴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평소에 틀지 않는 가부좌지만, 이 자세가 가장 안정적라고 한다. 하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이 단계를 넘기면 자연스럽게 고통이 사라진다. 이제 좀 더 호흡과 생각에 집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만가지 상념이 구름에 몰려 왓다가 사라지듯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경험부터 살면서 아쉽던 시절, 수없이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들과 나눴던 이야기도 생각이 나고, 그 때 왜 그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혹은 왜 그 순간 내가 말을 제대로 못했는지 아쉬움도 생긴다. 사실 이런 경험들이 기억 속에 내장되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눈을 감는 순간 거의 물밀듯이 밀려 왔다가 사라지곤 한다. 눈을 감고 생각을 모으려 했던 것이 오히려 저 지하실 맨 구석에 있는 쓰레기 먼지를 청소기 돌려서 부유물을 만든 격이다.이런 경험을 하다 보면오히려 당황하는 경우도 있지만 앞선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것을 여여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그런 단계를 거치다 보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한다.
안 쓰던 글을 쓰려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지금은 주로 컴퓨터 화면을 보고 글을 쓰지만 예전에는 글쓰는 칸들이 가득한 하얀 원고지 위에 글을 썼다. 이 칸에 한자 한자 글씨를 써서 글을 완성하는 데 그게 초보자에게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첫자 운을 떼기가 힘들고, 일단 떼었어도 계속 쓴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이런 과정을 겪다 보면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내가 글쓰기에 전혀 소질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쓸 데 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차라리 이런 시간 보다는 좀 더 유용한 일을 하는 것이 건설적인 일이 아닌지 등 서서히 글을 안쓰려는 이유를 찾는다. 결국 여우의 신포도가 따로 없는 것이다. 오래 전 젊은 시절 어떤 글을 쓴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보면 재털이에 담배만 수북한 상태로 밤을 꼬박 새는 경우가 많았다. 기형도 시인이 <빈집>이란 시에서 '공포를 기다리던 밤아.'라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글은 이런 과정을 무수히 거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글쓰기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다 보면 다음의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은 업무와 관련된 특수한 형태의 글쓰기와는 상관이 없다. 학자들은 논문과 책을 쓰는 경우가 많은 데, 이런 학술적인 글은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쓸 수가 없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이 읽어야 한다. 내가 쓰는 문장, 구문, 글 하나 하나가 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철저히 증거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학문적인 글은 그 글의 내용을 담보할 수 있는 객관적인 논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글을 쓸 때 자유로운 상상이 개입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런데 내가 늘 강조해 마지 않는 '에세이 철학'을 쓸 때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글을 쓰는 것은 온전히 나의 생각, 나의 언어를 가지고 쓰기 때문에 다른 글이나 저자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자유로운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체험이라 다른 이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마치 토굴에서 선수행을 하다가 깨닫는 수행자의 체험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한다. 나는 하나의 주제를 정해 글을 쓸 때 비교적 일관된 호흡을 유지하면서 30분에서 60분 정도에 걸쳐 원고지 2-30매 정도를 탈고한다. 이때 글을 써내려갈 때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고 통합되는 느낌을 받은 경우가 있다. 마치 형이상학자들이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형이상학 명제를 당연시 하는 것처럼 이 우주의 모든 정보들이 나의 브레인(brain) 속에서 연결되는 체험이다.
인간의 두뇌에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하고 각각의 신경세포는 다른 신경세포와 약 1천 개-1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하여 총 1016개의 시냅스를 형성한다. 하나의 시냅스에는 약 1000-2000여 종의 시냅스 단백질 이 존재하며, 이런 시냅스 단백질의 기능이 원할할 때 뇌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그 역의 경우에는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결국 문제는 신경 세포들이 시냅시스를 통해 상호 연결되고 소통이 잘 돼야 뇌도 그만큼 활성화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자유로운 글쓰기에 집중을 하다 보면 시냅시스의 활동이 고도로 활성화되면서 각각의 신경 세포에 담긴 정보들이 자유롭게 연결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뇌세포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정보의 활성화로 인해 마치 온 우주가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 특별한 체험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참선을 할 때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처음 가부좌를 틀 때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구름이 오가듯 새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경험이 이어질 수가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부유물들이 바닥으로 가라 앉듯 적막 강산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수행자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생각을 끌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장자>에서 말하는 특별한 심제(心齊)나 좌망(坐亡) 혹은 오상아 체험을 경험할 수 있다.
<장자>에 보면 좌망은 공자의 제자 안회가 어느날 공자에게 "스승님 드디어 좌망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좌망이 무엇인데?" 라고 반문했다. 안회가 대답했다. "자기의 지체(肢體)를 잊고, 생각을 멈추고, 현실적인 존재감이 없어지고 도(道)에 융합하여 일체(一體)가 된 것, 그것이 바로 좌망입니다." 또 안회가 "심제란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리고 청식법(聽息法)을 행하여 숨소리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나아가서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야 한다. 귀로도 듣지않고 마음으로도 듣지않도록 생각을 멈추면 허(虛)의 상태가 된다. 기라는 것은 허의 상태에서만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도(道)는 허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바로 그 허가 심제이니라." 또 장자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는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온다.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잊는 것처럼 내가 나를 장사 치렀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수행 과정에서 경험하는 자아의 특별한 경험을 지시한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행위의 주체라고 할 나 자신 까지도 잊고 공(空)과 허(虛)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진입에 대한 생각 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글쓰기와 참선은 서로 대비되면서도 공통의 경험을 가져올 수 있다. 글쓰기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참선은 모든 것을 연기법의 산물로 여겨 비워나가는 수행이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둘의 체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특별히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되는 경험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체험은 쉽게 과학의 언어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