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을 보는 데 피자 만드는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히 피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온갖 묘기를 부리는 데 거의 신기에 가깝다. 피자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일이고 노동이지만, 그것을 서커스 단원들이 부리는 행위를 하면 하나의 묘기이다. 그런 묘기로 하루에 700판 까지 피자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세계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가히 생활의 달인이라고 할 만하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달인들이 많다. 자신들이 평소 하는 일을 열심히 나름대로 생각도 하고 개선도 해 가면서 하다 보니 어느새 가능해진 일이다. <장자> 내편에도 포정해우(庖丁解牛)에 관한 우화가 나온다.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되었으며,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그야말로 매일 매일 생활 속에 하는 일에서 깊은 경지, 이른바 도(道) 경지에 오른 것이다.
오래 전 치과 의사인 내 친구는 자기가 치과의 달인이라는 느낌을 갖는다고 했다. 사실 그 친구는 산적 처럼 우락 부락하게 생기고 손도 곰 발바닥 처럼 생겼는데 치과 치료는 굉장히 섬세하게 잘 했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그 친구가 병원을 옮길 때마다 따라 다니면서 치과 치료를 20년 째 하고 있다. 현재는 파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안산에서 치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아내와 나는 겸사 겸사 놀러가듯 그 병원으로 가서 치과 치료를 받고 있다. 오래 전 한 석봉 선생이 글씨 공부를 할 때 한번은 어머니와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촛불을 끈채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 석봉은 글씨를 쓰는 내기다. 나중에 촛불을 켜고 보니 한석봉의 글씨는 삐뚤 빼뚤한데, 어머니가 썰은 떡은 아주 가지런하고 보기 좋게 썰려 있다. 이를 계기로 한 석봉은 자신의 글씨가 한 참 모자란 것을 깨닫고 더욱 정진해서 나중에는 글씨의 일가를 이루게되었다. 이렇게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일심으로 계속 하다 보면 달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일을 상상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쓰는 글도 그런 달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순전히 글을 쓰는 기술이란 면에서 본다면 충분히 달인의 경지를 꿈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고 매일 매일 쓰다 보면 남들 보다 더 많이 쓰고 더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작업의 공정을 개선하고, 글쓰기의 방법이나 도구도 개선해가며 글쓰기를 최고의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의 경우는 단순히 기술이나 기예, 혹은 특별한 도구만 가지고는 될 수가 없다. 글은 그냥 타이핑만 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과 사상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타이핑 실력이 좋더라도 쓸 내용이 없거나 글을 썼더라도 사유의 깊이나 통찰이 없다고 한다면 그런 글을 반길 사람은 없다. 때문에 글을 빨리 쓰거나 번지르하게 쓴다고 해서 달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글쓰기에서는 그런 외적인 기술 보다는 읽는 이를 빨아 들여 감동을 줄 수 있고 그의 성찰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글 자체의 내용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달인은 과거의 위대한 작가들, 사상가들에게나 어울린 이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을 우리는 달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글쓰기에는는 단순한 기술이나 기예와는 다른 사상의 측면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좀 더 고려가 필요하다. 예컨대 나는 글의 컨셉을 잡고, 그것을 기술하기 시작하면 거의 일관된 호흡과 빠른 속도로 글을 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는 내가 다른 어떤 라이터(Writer) 못지 않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자신도 글을 잘 쓰는 어떤 친구는 솔직히 이런 나의 능력이 부럽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보기에 나는 그냥 누에가 뽕을 따듯이 술술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는 지 모른다. 물론 글의 성격에 따라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주제에 따라서는 여전히 글을 쉽게 쓰기가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글을 쓰는 대상, 곧 주제의 비중과 그 주제를 마음먹은 대로 핸들링 할 수 있는 사유의 역량 등이 크다는 것을 할 수 있다. 같은 주제라 해도 그것을 다루는 역량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인에 적용되는 기준과 글쓰기에 적용되는 기준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사유에 있지 않을까? 다른 기예들은 그것 자체에 노력하고 몰입하는 경지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유가 전제되는 글쓰기에서는 단순히 기예와 기술 밖에 플러스 알파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옮고 그름이나 좋음과 나쁨이 가치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기술과 기예의 지극한 경지에 비추어 보면 달인이란 표현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검도나 유도, 서예의 지극한 경지에서 보는 서도(書道) 등 어떤 것에도 부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예와 기술의 경지에서는 다만 최고의 경지만 중요할 뿐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해도 좋은 것인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는 가치 판단은 들어가지 않는다. 설령 그런 판단을 한다 해도 그저 일반인들의 상식적 수준에서 할 뿐이다. 검도나 유도, 서도 등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칼쓰기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한 일본군 장교는 난징 사건 때 하루에 무려 700여명의 수급을 땃다고 한다. 비록 칼쓰기의 달인이라 할 지라도 결코 그를 존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쓰기에서는 기예 이상으로 이런 가치 판단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술적으로 잘 쓴 글이라 해도 그것이 사악한 목적을 위해 썼다고 한다면 좋은 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단한 필력을 가진 이들이 나쁜 목적으로 쓴 글들은 수도 없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