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철 Jun 06. 2024

가사노동

아내가 병원을 다니고 내가 집에 주로 있다 보니까 가사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일도 오래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있다. 가사노동은 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일같이 지겨워 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 오죽하면 예전 선사들도 "밥짓고 물깆는 데도 도가 있다"고 하면서 사미승들을 부려 먹었겠는가? 하지만 꼭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이런 일을 많이 하다 보면 인내심과 끈기가 생기고, 나름대로 일의 묘미나 원리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절에서는 이런 일을 3년 동안 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가 늘어난다고 한다. 



집안 일이라는 게 작은 것 같으면서도 손이 갈 데가 많다. 청소와 빨래를 해야 하고, 가끔씩 나가서 먹거리도 사와야 된다. 1주일에 한번씩 분리 수거하는 것도 일이다. 무엇보다 매일같이 먹고 치우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나는 이 중에서 밥을 하고 설겆이 하는 일은 누구 못지 않게 잘 한다. 내가 잘 한다고 자부할만큼 나름대로 상당한 경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집집마다 전기 밥솥이 있어서 예전처럼 힘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쌀을 씻은 다음 물을 어느 정도 채워야 되고, 언제쯤 밥솥에 넣느냐에 따라 밥맛의 차이가 크다. 묵은 쌀은 물을 많이 먹고, 추수한 지 얼마 안 되는 햅쌀은 물을 훨씬 적게 먹는다. 나는 당뇨가 있기 때문에 쌀밥이 안 좋다고 해서 잡곡을 넣기도 하고 콩을 불려서 넣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변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물의 양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물이 정도 보다 많으며 질고, 너무 적으면 되다. 나는 사실 된 밥을 좋아하지만 독일에 있는 딸과 아내는 진 밥을 좋아한다. 때문에 적당한 타협점이 필요하다. 그것을 맞추는 일도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밥솥의 물을 맞추기 위해 손이나 젖가락으로 물높이를 재는 경우가 있지만 나는 그냥 눈대중으로만 한다. 그래도 대단히 정확한 편이다. 이것은 오래 전에 마이클 폴라니가 말한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명시지'(explicit knowledge)와 달리 경험지이면서도 드러나지 않은 '암묵지(tacit knowledge)라 할 수 있다. 당구장에서 쓰리 쿠션을 칠 때 어느 정도 포인트가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맞지는 않는다. 당구공을 칠 때 큐에 가하는 힘과 속도 그리고 회전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고수들은 쓰리 쿠션을 칠 때 이런 포인트에게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노하우를 말로 분명하게 하라고 하면 말 할 수가 없다. 일종의 암묵지라 할 수 있는데 밥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암묵지를 터득하는 것은 사람마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비교적 직관이 발달한 나는 이런 암묵지를 빠르게 배우는 편이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설겆이 하는 일도 나의 전문 분야다. 나는 설겆이 하는 일을 특히 좋아한다. 남들은 밥 먹고 나서 설겆이 하는 것을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고 하지만 나는 좋아한다. 설겆이를 하다 보면 오히려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도 든다. 아내는 요리를 할 때 이것 저것 잔뜩 널어 놓고 한다. 그래서 아내랑 이것 저것 차려서 한 끼 먹고 나면 개수대에 설겆이 감이 잔뜩 쌓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쾌재를 부른다. "앗싸! 설겆이 할 일이 많네." 이 많은 것들을 하고 나면 그만큼 내 마음 속의 찌꺼기도 씻어내는 것이다. 일단 설겆이를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냥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릇에 기름끼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리시켜야 한다. 그리고 기름끼가 없는 것은 세재를 약하게 사용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 미지근한 물로 씼어내면 된다. 식당에서 설겆이 할 때를 보면 세재를 비누 거품처럼 잔뜩 풀어 놓고 하지만, 집안에서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설겆이 할 때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온도 조절해서 이용하는 편인데, 사실 웬만한 설겆이 감들은 이렇게 다 해결된다. 하지만 요리나 찌개를 담은 그릇들은 세재를 풀어서 하지만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은 어디서나 환경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재를 많이 사용하면 그만큼 환경 오염을 가중시킨다. 굳이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고서도 잘 할 수 있는데 어떤 이들은 정도 이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일단 설겆이 한 그릇들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때도 끼리 끼리 그릇을 정도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사용할 때 훨씬 도움이 된다. 



내가 밥과 설겆이를 잘하지만 요리는 잘 못한다. 요즘은 요리하는 남자들도 많이 늘고 있다 하지만 요리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래도 내가 몽골에서 1년 동안 생존을 하면서 찌개나 간단한 탕류는 끓일 수 있다. 하지만 요리는 일종의 생활 예술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배워서는 늘지 않는다. 요리도 배우면 할 수 있겠지만 요리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먹고 치우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나 비경제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배우지 않는다. 무엇보다 요리는 내 입에 특화된 아내의 솜씨가 있어서 해주는 대로 맛  있게 먹는 편이다. 요즘은 가사 노동에서 남녀 구분이 점차 없어 진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7-80% 이상을 할 것이다. 그나마 예전처럼 100% 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면 남녀의 역할도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남자들도 귀찮게만 생각하지 말고 생존 기술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번역 문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