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철 Jun 14. 2024

북한의 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해 북러 회담을 열 것이라고 한다.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가깝지만 중국의 속내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에 늘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북중 관계를 어느 정도 견제하려면 러시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체제 문제를 풀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북한의 길]



과학사가 토마스 쿤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를 처음 접한 것은 내가 막 대학원에 들어갔던 시기니까 아마도 1982년 쯤인가 싶다. 그 당시는 번역본이 없어서 영어로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멍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과학사의 전개 경험에서 얻은 이론이지만 다른 분야로의 확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느꼈다. 



패러다임이 갖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겠지만,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론적 틀(framework)의 역할도 한다. 모든 정상과학은 주어진 패러다임 안에서 문제풀이(problem solving)에 주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틀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들이 생길 수 있다. 그 때 이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혁명적 순간이 일어난다. 패러다임 스위치 (paradigm-switch)가 그것이다. 뉴턴 역학이 물리적 자연세계를 잘 설명했지만 극대와 극미의 세계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19세기말부터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 틀 안에서 그런 문제를 설명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쿤이 말하는 기존 과학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혁명은 이렇게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데서 일어난다. 



과학 이론의 전개에서 얻어진 쿤의 설명은 사회 변동이나 체제의 혁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한 사회가 지켜오던 규범이나 관습, 법과 문화 같은 것들이 극도로 흔들리는 경우들이 있다. 19세기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은 시차를 두면서 거의 비슷한 서구 문명의 충격을 경험한다. 중국은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에서 밀려 난징조약같은 불평등 조약을 맺고, 이런 사정은 그 이후로도 반복이 되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몰고온 5척의 함대를 본 막부 사회의 일본인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혼란을 겪었다. '검은 배'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막부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이 사건을 두고 '양이냐 개국이냐'라는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심하게 겪는다. 그 사회에 가장 불만을 느꼈던 하급무사들은 기존의 틀로는 일본 사회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메이지 유신'이 탄생한 배경이다. 



1863년 고종이 등극하자 바로 대원군이 섭정했다. 그는 오랜 야인생활을 통해 조선의 문제를 확인하고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호포법을 실시하고 막강한 비변사도 해체했다. 이런 과감한 조치를 통해 조선이 서서히 정상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세 가지 문제가 큰 장애가 되었다. 하나는 병인 박해를 통해 개혁의 인적 자원의 씨를 말린 것이고, 둘은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 중건에 나서면서 재정을 탕진한 것이며, 셋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의 충격이 오히려 면역 주사가 된 것이다. 처음과 둘을 통해 개혁의 자원이 소실되고, 셋을 이유로 나라의 문을 완전히 닫아거는 쇄국정책을 폈다. 일본은 '검은 배'의 충격을 내부 개혁의 수단으로 삼았지만 조선은 오히려 일본의 길보다는 청나라의 길을 보면서 더 강한 쇄국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조선이 20세기 들어 식민지로 들어서게 된 이유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위기의 순간에 단순히 문제 풀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쿤의 해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절감한다. 북한이 핵과 경제의 양면적 발전을 통해 체제도 지키고 경제도 발전시키겠다고 한 판단은 오랜 실험 결과 실패한 정책이다. 핵과 미사일을 발전시킴에 따라 주변국가들의 견제가 심해지고 유엔을 앞세운 국제사회의 고립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의 경제가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을 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경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은 아무리 문제풀이에 집중을 해도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뛰어난 지도자는 이런 순간을 파악하고 혁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날 수 있는 과감한 체제 전환의 실험이 필요하다. 북한은 지난 2년 동안 그런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경험했지만 양요를 겪은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면서 더욱 문을 걸어잠근 것처럼 대남 적대의 날을 세우고 있다. 19세기 조선이 21세기 북한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아가멤논이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하려 할 때 배를 띄우려 해도 바람이 불지 않았다. 이때 아가멤논은 신탁을 받는다.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라.' 결국 고심끝에 아가멤논은 눈 속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이피게니아를 제단에 받친다. 피눈물 나는 결정이고, 이로 인해 1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귀국했을 때 원한을 가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신탁이 가르려준 진실은 양 손에 모든 떡을 쥘 수 없다는 도저한 진실이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새롭고 혁명적인 시도를 할 수가 없다는 의미다. 북한이 '핵과 경제' 모두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한 그들은 여전히 돌머리를 가지고 문제풀이에 골몰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인민들이 볼모로 잡혀서 학정과 가난에 신음할 뿐이다. 지금의 북한 체제는 김정은 일가와 그를 둘러싼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체제다. 국제사회의 진화와 발전과 무관하게 갈라파고스 섬처럼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김씨 왕조는 여전히 유지될 수 있을지 몰라도, 수탈당하는 인민들의 삶은 누가 보상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관점도 필요하겠지만,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외재적 관점도 배제할 수 없다."(4년 전 옛글)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몰랐던 백제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