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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Sep 12. 2024

삼봉 정도전 기념관 탐방



오늘은 평택에 위치한 삼봉 정도전 선생의 기념관을 방문하는 날이다. <한국의 사상가 탐방회>를 만들어 첫 번째로 선정한 것이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관이다. 차가 막힐 것을 우려해 일찍 일어나 6시에 아내를 병원에 출근시켜 주고 바로 자유로를 타서 외곽 순환 도로에 진입했다. 그런데 평일인 데도 차가 많다. 장수 IC까지 가는 데만 무려 30분 이상이 걸린다. 엊저녁은 백로를 지난 날씨답지 않게 열대야 현상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불을 껏는 데도 잠이 안 와 일어나서 요즘 새로 시작한 자전적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제2부를 쓰기 시작했다. 너무 잘 써져서 쓰다 보니 새벽 3시다. 다음 날 고속도로 운전이 신경이 쓰여 짧은 잠이라도 자야 돼서 억지로 잠을 청해서 일찍 일어났는데 막힌 도로를 보니 별 보람이 없다. 



그래도 약속한 평택역에 10시 전에 도착을 해서 먼저 와 있던 이태곤 선생과 전은수 선생을 픽업했다. 전은수 선생은 멀리 경남 의령에서 올라오신 거다. 정성이 대단하다. 이곳에서 삼봉 기념관까지는 대략 18킬로라 30분 정도면 도착이 가능하다. 도착을 해보니까 이미 문향미 선생이 먼저 도착을 해서 기념관 사진을 다 찍었다고 한다. 바깥 날씨는 한 여름의 땡볕이 쨍쨍하다. 기념관은 얕은 산을 배경으로 앞이 훤하게 트여서 보기 좋다. 기념관 가이드 선생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먼저 우리는 삼봉 관련 간단한 영상물을 시청한 다음 옆 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속에는 삼봉의 커다란 영정과 함께 여러 가지 유물들, 그리고 삼봉 전집 목각본이 수십 권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도전이라는 이름이 궁금해서 어떻게 이 이름이 본래 이름인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형부상서를 지낸 부친 정운경에 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도전의 형제는 모두 셋으로 둘째는 정도존(鄭道存), 셋째는 정도복(鄭道復)이다. 도와 ‘관련된 이름이 도(道)’를 전하고[傳] 보존하고[存] 회복시키기[復]를 바란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삼봉이 방원에게 척살된 이후 그의 형제들과 후손들이 함께 죽음을 당했지만 유일하게 생존한 자손이 후일 복권되어 다시 관계에서 활동한 점, 그 자손의 힘으로 후일 삼봉의 전집이 출간 보존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해설사는 중간중간 우리들의 질문도 받으면서 노련하게 답변해 주었다. 



삼봉 정도전(1342년 10월 6일~ 1398년 10월 6일은 잘 알다시피 조선을 설계한 뛰어난 유학자이다. 그는 고려 말 대 유학자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면서 포은 정몽주의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성품은 평소 강직한 편이라 불의를 쉽게 참아 내지 못해 주변의 인물들과 불화를 많이 했다. 고려 말 우왕 치하에서 반원 친명 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에 의해 나주 회진현 거평 부곡(현 백동 마을)으로 유배 당했다. 그는 이곳에 거주할 때 일반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스러운 삶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나중에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현장 경험되었다. 



“1383년 나이 42살 때 함경도 함주로 가서 동북 면 도 지휘사로 명성을 날리던 이성계와 만나 정치 사회 등의 개혁을 결의했다. 이때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만한 군대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이성계의 의중을 떠 보았다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충분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선비가 불원천리하고 함경도까지 가서 무장을 찾아본 까닭이 무엇일까? 삼봉 선생은 단순히 책에서만 읽고 개혁 혹은 혁명을 꿈꾼 것이 아니다. 그는 고려 말 불교와 귀족들의 호사한 삶과 백성들의 참혹한 삶을 대비 시키면서 세상을 뒤집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점에서 그는 다른 책상물림 선비들 과는 달랐다. 어제 해설사도 강조하면서 이야기했지만, 이성계와의 만남은 정도전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필요한 제도와 법령을 세우고, 조준 윤 소종과 더불어 전제 개혁을 추진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조준의 개혁이 미진해서 권문세족 등 구세력의 토지를 완전 몰수해 신진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그는 태조 2년인 1393년에는 동북 면 도안 무사로 임명되어 함길도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 구역을 정비했다. 태조 3년 53 때 판의홍 삼군 부사로서 사병을 혁파하는 병제 개혁을 단행하고, 경상 전라 양광도의 삼도도총제사로 임명되어 행정 구역을 개편했다. 태조 4년에는 정총과 더불어 고려사 37권을 편찬하고 성군의 통치 이념인 경제문감을 지었고, 인왕산과 백악산 등을 실측하여 도성의 범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 건축을 주도하여 완성했으며, 경복궁의 이름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등의 궁전 이름도 지었다고 한다. 태조는 삼봉 선생의 업적을 치하하여 “유학에도 으뜸이요, 공적도 으뜸”이라는 뜻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의 친필을 하사했다. 우리 일행은 기념관에서 이 친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조 5년에는 판의홍삼군부사에 재차 취임하여 ‘진도’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출병을 시도했으니, 온건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를 보면 삼봉 선생은 중국의 제갈양 처럼 진법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요동이 한민족에서 차지하는 공간적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사실 요동을 친다고 한 것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할 때 “작은 나라가 어찌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있겠느냐?”는 명분을 삼봉 선생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이 개국할 때 친명은 표명했지만, 처음부터 사대(事大)를 따랐다고 할 수는 없는 근거다. 태조 7년에는 동북 면 도선무 순찰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경하자 태조는 그의 업적이 고려 시대 9성을 쌓은 윤관의 업적 보다 크다고 치하했다. 이 해에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19편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 입국의 정당성을 정립하기도 했다. 나중에 카페에서 우리 일행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태곤 선생은 불교를 비판하는 정도전의 논리가 조잡하다고 비판했다. 일찍이 주희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정도전의 비판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씨잡변’은 불교의 노선을 불씨의 답변이라고 비하한 데서 볼 수 있듯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 차원에서 나온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해 여름에 정도전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위해 양주 목장,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진도’에 의한 군사 훈련을 독려하고, 민본정치를 추진하던 중 8월 26일 새벽에 송현(지금의 한국일보사)에 있는 남온의 집에서 이방원 일파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고 관직을 삭탈 당했다. 다행히 큰 아들 진(津)은 중추원부사로서 태조를 수행하여 함흥에 있었으므로 목숨을 유지하고 세종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했다. 영과 유 두 아들은 삼봉 선생과 함께 화를 당했다. 삼봉 선생의 죽음은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을 주장하고 세자사(世子師)의 위치에 있던 선생과, 세자 채봉 및 사병 혁파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 간의 갈등이 빚어낸 역사의 불행이었다.”(삼봉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룬 이 부분은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선생의 발자취>라는 책자에서 인용도 하고 내가 첨가한 부분도 있다.)



삼봉 선생 기념관을 탐방하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는 이미 이방원이 6년 전 1392년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경험을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 이방원에 대해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과연 정도전의 권력의지가 이방원에 비해 크게 약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사병을 혁파했기 때문에 이방원을 과소평가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이방원을 보아온 정도전이 과소평가했다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경계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결국은 권력 게임에 임하는 정도전의 권력 의지가 너무 약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지 문제는 그가 재상 중심제로 조선을 설계한 데서도 보인다. 실제로 새로 개국한 조선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왕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이방원이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방원은 나중에 왕의 자리에 등극했을 때 그를 밀어 주었던 처가 식구들도 세도 정치의 우려 때문에 주살한 인물이다. 정도전이 합리적인 인물이라 왕권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현명한 재상제와 사간원 등의 제도를 세웠는지 모른다. 내가 보기에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 나라가 안정이 된 세종이나 성종 때쯤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막 새로 개국한 조선 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은 개혁주의를 표방했지만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 자라는 한계도 있었다. 



두 번째 같은 맥락이지만 정도전은 주자의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서 조선을 설계한 사상가이다. 철학의 이념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공화국>을 쓴 플라톤에 버금할 만하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자신의 철학에 따라 철인 왕 제도, 처자 공유제를 비롯한 국가 운영을 위한 다수의 제도를 정립했다. 이들은 똑같이 철학의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주의가 실패했든 정도전 역시 현실 역사에서는 실패한 사상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도전과 이탈리아의 정치인 마키아벨리(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삼봉 정도전 선생은 1342년 생이니까 니콜로 마키아벨리 보다 120년을 앞섰다. 잘 알다시피 마키아벨리는 서구 정치사에서 근대의 지평을 연 정치 철학자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언급했다. 그는 이때 신생국가의 군주와 세습 국가의 군주의 차이를 말하면서 세습 군주는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으므로 기존 질서를 바꾸지 않고서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지만, 신생 군주는 모든 것을 새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태조의 조선을 예로 든다면 전형적인 신생국가이기 때문에 재상 중심 제보다는 왕권 중심제가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은 이방원과 손을 잡아서 조선을 이끌어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그는 태조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리와 인정을 현실 논리보다 앞세운 것이다. 



셋째, 삼봉 정도전 선생의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민본사상’를 강조한 것은 대단히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민본주의는 주가 유배 시절 직접 보고 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실적 이론이다. 정도전은 “권력은 하늘에서 나오고, 하늘은 백성에서 나온다"라고 강조한 것도 그의 강력한 민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본사상을 대부분의 조선의 왕들이 따랐지만 현실적으로 백성이 근본이 된 경우는 드물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위계에 따라 일국의 부를 창출하는 백성들을 오히려 하위에 두고 평생 책상 위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사대부들을 우위에 두었다. 이런 위계에 따라 조선의 생산력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떨어져 이웃 일본이나 청나라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결국은 백성을 쥐어짜서 국가를 운영하고 시대부들의 생존을 유지한 국가가 조선이다. 이런 나라에서 ‘백성이 근본이다’는 민본은 그저 허울 좋은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피폐한 삶을 유지하기 힘든 일반 백성들은 처가 권속을 데리고 만주로 탈춣 하는 대열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과 조선의 다른 선비들은 격이 다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삼봉 선생은 현실 경험에서 나왔고, 조선의 유약한 선비들은 그저 입에 발린 수사로 민본을 떠든 것이다. 



넷째, 조선은 위에 나온 경력에서 보듯 단순히 책만 읽은 책상물림이 아니다. 그는 병서의 진법을 연구했고, 토지 개혁을 위한 경제 제도를 정립했으며, 한양을 설계한 인물이다. 아마도 이와 버금하는 조선의 사상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수원 성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있지 않을까 한다. 20세기 한국 경제를 일으킨 정주영 회장도 말할 수 있다. 정씨 들이 이런 현실 능력들이 뛰어난 유전자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체제를 감안한다면, 병법과 경제에 통달하고 한양을 설계한 기술까지 겸비했고, 또 ‘불씨잡변’을 써서 이데올로기 투쟁 전선에서 선봉에 선 삼봉 정도전 선생은 만능선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는 이런 경험과 생각을 새로 창업한 국가에서 실제로 구현하고 실현하기도 한 현실 정치인이었다. 비록 그가 말년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는 서양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나 조선의 다산 정약용 선생 못지않은 대단한 사상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삼봉은 참으로 조선이 자랑할 만한 인물이다. 후손이 잘 되면 조상이 빛을 발한다고 한다는데, 삼봉 정도전 선생은 충분히 동아시아의 정치 사상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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