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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Oct 01. 2024

새로운 시도


내가 퇴행성 관절염으로 인해 페북을 쉬면서 하나 생각한 게 있다. 철학 논문을 쓰기 보다는 문예 비평이나 소설을 써보는게 어떨까라는 것이다. 철학 논문은 대부분이 특정 철학자들이나 철학 주제들을 중심으로 쓰다 보니 자기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자기 해석이 들어가기는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의 글쓰기는 대부분 3인칭이다. 만일 1인칭으로 논문을 쓰면 사적 담론으로 간주해 인정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소설은 최악의 경우라도 1인칭으로 글을 쓰며, 3인칭으로 쓴다 해도 1인칭의 생각이 밑에 깔려 있다. 소설은 무엇보다 모국어에 충실하고,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삶과 현실을 표현하는 일에 주력한다. 물론 상상적인 것이나 이국적인 현실이 그려진다 해도 여기의 현실과 연관돼서만 가능할 것이다. 남의 생각을 해설하고 해석하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마도 이것이 철학과 소설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20대 문학 청년도 아닌 나에게 창작 욕구가 엄청 넘치고 있다. 배도 물이 들어올 때 띄워야 하는 것처럼 올 가을에는 소설을 열심히 쓰려고 한다. 


내가 최근에 문예 비평에 관심을 가지면서 관련된 논문이나 책을 보고 있다. 내가 문예 비평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비평은 다른 이들의 작품을 비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자기 생각만 표현하는 일은 아니다. 이때 비평가의 생각의 깊이나 넓이가 나의 관심이다. 철학 역시 무엇보다 비판에 충실한 학문이다. 그런데 문예 비평가의 비평과 철학자의 비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라는 점이 궁금하다. 


문예 비평가들은 비평 작업 이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문체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의 경우에도 문체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학술적 글쓰기에서 보듯 드라이하다. 반면 철학자들의 비판은 통찰이나 비판의 깊이에 관심이 크다. 문예 비평가들의 작품을 보다 보면 이런 깊이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깊이는 대부분 철학에서 빌려 오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숙지 되지 못하다 보니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철학의 깊이를 가지고 작품 비평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평은 반드시 소설일 뿐만 아니라 시도 해당되고, 영화나 미술 작품을 위시한 현대의 수많은 대상들로 확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이 창의성을 잃고 원숭이 흉내 내듯 고정된 것을 반복한다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글쓰기도 끊임없이 장벽을 부수고 장르를 넘어서 새로운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문예 비평과 철학의 역사를 보면 이런 창조적 실험을 통해 새롭고 창의적인 작품이 탄생되었다. 내가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할 수 있는지 없는 지는 일단 해보고 나서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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