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현장에서 학부모들의 과도한 간섭과 압력으로 인해 꽃 같은 선생님이 목숨을 끊었다. 이번 사건이 일회성이나 돌발성이 아니라 전국 교사들의 공분을 사면서 연일 추모의 길이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다른 곳도 아닌,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을까? 조금만 생각하더라도 자신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나쁜 지 알 수 있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나?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나? 아마도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행동할까? 그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적인 생각보다 다른 어떤 강력한 동기가 있어서 일까? 그런 동기가 과연 무엇일까? 감정일까, 욕망일까? 아니면 경제적인 동기일까?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아침부터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인간에 대한 규정은 여러가지가 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말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규정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식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근대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Descartes)는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만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물질, 비계 덩어리나 다름이 없다. 마치 파워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의 컴퓨터가 단순한 고철 덩어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파워가 들어오면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컴퓨터처럼, 생각 하는 인간은 무인도를 개척한 로빈손 크루소우 처럼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했다. 서구의 근대의 주인은 이 '생각하는 인간'이다. 여기서 근대인의 주체성, 자의식 개인성 독립성, 창의성 등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근대화를 이끈 16세기에서 19세기 까지는 이런 근대인의 낙관적인 꿈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유는 자유로운 사유의 형식일 뿐 그 형식을 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과는 별개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인간을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이기적 동물'로 간주했다. 인간 존재를 지탱해주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 본능이고, 그것은 이기심의 발로이다. 때문에 이런 이기적 존재들의 관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일 뿐이다. 그는 나중에 장자끄 루소가 자연상태를 평화상태로 보았던 것과 달리 '야수들의 전쟁터'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이나 다름이 없다. 때문에 전쟁을 막아줄 수 있는 거대한 괴물(Leviathan)에게 일정한 자유와 권리를 양도하는 대신 생명과 재산의 안을 보장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국가는 이기적 개인들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계약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홉스가 이렇게 인간을 극단적인 이기적 존재로 보았던 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인간 규정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며, 짧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인 감정에 사로 잡힌 존재로 볼 것인가는 철학사의 오랜 논쟁이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한 플라톤은 감성과 감정, 욕망은 억제의 대상이고, 언제든 째찍을 가지고 이런 욕망을 다스려야 하는 존재이다. 플라톤은 이런 욕망을 대변하는 여성이나 예술가들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이성적 공화국에서 추방했다.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서구의 이성 중심의전통은 거진 2천년 가까이 서구인들의 사고를 지배해왔다. 여기에 근본적인 반기를 든 철학자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다. 그는 철학적 인식론에서 회의주의자(Sceptist)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성이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감정이 이성의 주인으로 본다. 그가 보기에 어떤 사안을 대할 때 합리적 고려 하에서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판단이 먼저 내려진 다음에 그것을 이성이 후행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흄의 이런 결론은 현대의 심리학 실험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남녀 간에 첫 미팅을 가질 때 상대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되는 시간은 단 0.2초 뿐이 안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감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이성은 그것이 호감이든 아니면 비호감이든 노예 이성이 주인 감정의 가방을 들고 쫒아다니면서 뒷치닥 거리 하듯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은 이렇게 전통적인 이성과 감정의 관계를 완전히 전도시켰다.
19세기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기 보다는 비합리적 존재에 가깝다는 생각을 강화시켜 준 시기였고,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세 명의 사상가가 있다. 첫째가 칼 마르크스(Karl Marx)이고, 둘째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 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이다. 이들을 제대로 다루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다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그 사상의 핵심만 언급하기로 한다. 공산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칼 맑스의 핵심 철학 사상은 비교적 초기 작품인 독일 이데올로기(Deutsche Ideologie)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을 언급한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은 무엇보다 세계를 개척하는 인간 의식에 주목했다. 세계와의 관계에서 의식이 능동적인 주인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관계를 전도시켜 버렸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단일한 이성일지 몰라도, 인간의 존재는 여러가지 물질적 조건에 기반한 경제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유명한 '토대-상부구조론'이 나온다. 토대가 경제이고, 그 법이나 이념 이성 등은 이 토대의 결정을 받는다. 물론 오늘 날 이런 토대 결정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물질 세계와 존재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니체는 강단 철학의 일반적 전통을 벗어나 활동한 19세기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물론 그는 정통 문헌학자로 출발해 약관 24세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28세 젊은 나이에 <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을 썼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오히려 대학을 떠나서 바깥에서 활동을 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의 정신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을 플라톤 식의 이성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의지로 보았다. 이미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그리스를 움직이는 두 가지 정신으로 합리성을 대변하는 아폴로적 정신과 비합리성을 대변하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구명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이런 합리적 이성 보다는 비합리적인 정신 세계를 대변하는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 중반까지 활약한 정신 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앞서 말한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대학 바깥에서 활동하면서 20세기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의식 세계가 주인임을 밝혔다. 우리가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자아(ego)는 성적 충동 에너지인 이드(id)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 이성의 결정판이라 할 현대의 과학 기술이 전쟁의 강력한 수단이자 문명을 파괴하는 수단이 되는 현상을 보면서 '문명의 자살'을 생각했다. 도대체 자기 자신을 죽이는 문명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인간의 정신세계는 그것을 묶어주는 삶에 대한 충동(eros)과 이와 정반대로 그것을 풀어 해체시키는 죽음에 대한 충동(thanatos)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상 초기에는 생존 본능에 기초한 에로스에 우위를 두었다가 20세기 초에 일어난 1차 세계 대전을 보면서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에 더 비중을 두었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비합리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다 보니 인간의 위상 변화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래 전 슬라보이 지젝의 <라캉>이란 책에 소개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위상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3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본래 인간은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이고, 인간이 사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따라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계의 속한 항성에 불과한 것이다. 두 번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원숭이에서 진화한 존재, 그 최초의 출생은 비천한 아메바일 수도 있다는 것을 찰스 다윈(Charles Dawin)이 진화론에서 밝혔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자기 정신의 주인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프로이트가 밝힌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합리적 의식이 아니라 숨겨 있는 빙산과도 같은 거대한 무의식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비합리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보다는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인간 존재를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을 때 인간 존재에 대해 가타 부타 뭐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인간 존재 자체를 X로 규정하는 순간 그를 둘러싼 담론은 수없이 생산돼도 인간 존재는 여전히 할 수 없는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