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18일이다. 45년 전 오늘은 광주에서 참혹한 학살이 시작된 비극의 날이다. 5.18 항쟁은 1980년 대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간 성화 역할을 했다. 나의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에는 5.18과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연일 민주화를 요구하고 전두환 물러나라는 데모 열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10만여 명의 대규모 데모대가 서울역을 눈앞에 두고 회군했다. 지도부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당시 반대도 많았다. 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는가 하면서 아쉬운 표정들을 많이 지었다. 하지만 데모대가 탈취한 경찰 버스에 시민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고, 연일 이어지는 데모 대에 대해 언론과 여론의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회군한 총학 지도부는 16일 토요일 이대에 집결해서 향후 정국 대비 전국 총학 연석회의를 열었다.
고시원에서 내가 거주하던 방은 2층 맨 끝방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9시쯤 돼서 갑자기 내 방으로 평소 알던 선배가 뛰어 들었다. 그의 첫 마디는 ‘당했다!’ 였다. 그는 법대 학생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선배였다. 군대를 다녀온 그는 대중 연설과 선동에 탁월했다. 단과대 학장을 맡고 있었을 때 나 보고 법학과 과 대표를 맡아서 정법대 분위기를 잡는 데 일조하는 게어떠냐고제안한적이있었다. 물론나는고시핑계로그제안을물리쳤다.
“도대체 당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선배는 이대에서 열린 전국 총학생회에 참석했었다.
“총학생장들이 회의하던 이대에 경찰이 덮쳤어. 대부분 현장에서 붙잡혔고,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아 도망칠수있었지. 나는 이대 후문 쪽 담장을 넘어서 바로 여기 법대 고시원으로 도피한 것이야” Y대 동문 쪽 후문에 있는 법대 고시원은 E여대 후문과 멀지 않았다. 이곳 지리에 밝은 그는 길 건너 바로 이고시원으로 올 수 있었다. 그가 맨끝의 방으로 온 것은 만약의 경우 바로 튈 수 있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배의 ‘당했다’는 표현은 당시 상황을 아주 잘 드러냈다. 사실 하나회가 이끄는 군부는 학생들 데모를 거리로 유도해서 호시탐탐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하나회 실권 세력의 이런 계략을 알만한 사람들은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신군부는 학생들이 서울역 회군을 단행하면서 휴지기에 들어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대에 모인 학생 지도부들을 일거에 검거하면서 뜨겁던데모열기에찬물을끼얹은셈이다. 하지만이정도로끝난것은아니었다. 그들은훨씬더큰 규모의 희생을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1980년 5.17일 9시 너머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단 20분 만에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전격적으로 계획된 수순이었다.
7공수 특전여단이 광주에 내려온 시각은 5.17일 자정을 넘어서였다. 그들은 부마 항쟁을 진압한 경험이 있는 부대였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일요일이지만 학교 도서관이나 기타 볼일 보러 온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팼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자신들의 학교에서 어이없이 곤봉으로 두들겨 맞은 학생들은 일단 학교 밖으로 피했다. 100여 명 가까이 광주역 근처로 모이자 그들은 하나 같이 공수 부대를 성토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광주의 5월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상 최악의 살육으로 도배되었다.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공수 부대가 적과 싸운 것이 아니라 비무장 일반인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상을 하고 총기를 난사했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공수 부대의 이러한 만행은 처음부터 기획된 것일지 모른다. 시위대와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면 절대로 총구를 대한민국의 국민을 향할 수 없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 광주를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 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세력에게 철퇴를 내리려는 의도가 강했다. 때문에 그들은 초기부터 강경진압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피를 본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똘똘 뭉쳐 저항했던 것이다. 한국의 1980년 대는 이 사건을 기화로 민주 대 군부 독재 간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내가 광주 학살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바로 경찰서 유치장 안에 들어와 있던 한 잡범을 통해서였다. 유치장 안은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다. 특히 밤에는 입담 좋은 친구들 주변으로 삼삼오오 몰려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담당 경찰관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묵인했다. 하루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했고, 자신은 사선을 넘다시피 해서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가 그날 밤 구구절절이 광주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을 때 다들 할 말을 잊은 듯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리얼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도 사투리로 떨리는 듯 말했다.
“정말 이제 못 보겠습디다. 공수 부대 안 있소? 완전히 무장해 갔고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빡부터 뚜드려 패버리는 거예요. 그러먼 그 자리에서 자빠져불죠. 그렁께 여기저기 사람들이 막 쓰러져 있는거예요. 일어설수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옷부터 배께갖고 팬티만 남기고 도로에 무릎꿀레서 일렬로 안치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패 부었어요. 길 가던 시민들은 놀래갖고 '오매 저러다 사람 죽이겄다'고 하면서도 군인들이 워낙 살기가 등등하니까 어쩌지도 못하고라. 최루탄을 쏴나서 눈도못뜨고 숨도 못쉬고요. 멀리서 보고 오다가 도망가는 젊은이가 있으면 끝까지 쫒차가서 같은 방식으로 패버리는 거예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날밤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때 일반 잡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도저히 국민의 군대라고 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국대 운동권 출신의 한 사람이 질문했다. “직접 당신이 확인한 건가요?”
“그러문 요오. 신문에 안 나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3일째 되는 날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께 무서워서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화순 쪽으로 빠져서 어떻게 기차를 겨우 타고 서울로 도망을 온 거예요. 물론 오면서 양심의 가책도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들도 저렇게 무자비허게 당하고 있을 텐디 나만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요.”
그가 광주의 현장에서 도망간 것에 대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1차적인 보호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한반도의 남녁은 깊은 침묵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과연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주여!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 디스 도미네)
그날 그에게 끔찍한 광주의 학살 현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히 분노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렸는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가, 감방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여파가 밀려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등등으로 밤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