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age

by 이종철

옛글을 검토하다 보니 오래 전 모 여대에서 강의할 때 학생과 게시판을 통해 나누던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대단히 실존적인 질문과 답변이지요.

"<문> 선생님, 철학을 공부하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회의를 느끼게 되지 않나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제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지, 길어야 백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삶을 누리는 것이, 그 동안에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백지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진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어도, 그 시간 중 1초도 낭비하고 싫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던진 건 철학 개론 수업이 듣기 싫어서가 아니란 걸 아시죠? 인간 실존의 이유를 묻는 제가 어리석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에서 특히 제 머리는 제대로 기능하지를 못해 참 답답합니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많이 가지만 철학에 잘못 빠지면 혹시나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이 학생의 머리 속에 가득해 보인다. 내가 이렇게 답변을 주었다.


“먼저 이곳에 질문이 있었는지를 몰라 아주 늦게 답변하는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모든 질문을 이곳에서 하죠.


1. 질문의 의도가 이런 건가요? 실존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는데, 다른 한편 해결되지 않는 물음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싦을 회의와 불안에 빠뜨리는 것은 아닌가? 나는 그것이 두렵다!


2. 어쩌면 그런 생각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철학적 물음이 중요해도 내 사전에 방황은 없다. 그런 일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오늘 날 계산적 사고를 가지고 시간을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특히 시간이 곧 돈이라고 주장하는 비즈니스적 사고에서는 그런 판단이 아주 당연할 수 있죠. 하지만 우리 인생이 정해진 궤도로만 달리고 내 앞에 멀어지는 모든 사건에 대해 합리적 계산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해진 궤도로 달리는 지하철에서도 생각하기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요? 우리의 존재는 확실하기 보다는 우연적이고 불투명한 측면이 더 많지 않나요? 우리의 몸,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영속적이지 못하고 확실한 토대 위에서 진행되지 않지요. 철학적 물음은 우리의 삶의 불안과 불연속성, 우연성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3.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물음으로 방황하거나 다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는 근원적이고 충격적인 경험은 내가 관념상으로 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운명같이 다가오는 사랑은 그것이 달콤한 만큼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고통과 좌절을 안겨줄 수 있어요. 그러한 고통의 경험이 싫다고 해서 사랑을 나의 관념 속에서만 구성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전혀 낯선 타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존재의 한 복판으로 들어오는 충격적 경험이지요. 그러한 경험에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이 정상적으로 작동합니까? 그러고 보니까 오래전에 보았던 줄리엣 비노쉬하고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데미지>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독일어로 비교적 gesund하게 인생을 살아왔고, 사회적 명망이나 가족 관계 모두 안정되어 있는 중년의 스티븐 마틴이 아들의 연인을 만나는 순간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사랑의 열정에 빠지죠.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거의 충격적이라 할 만큼 스티븐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여인과 불륜의 섹스에 탐닉하지만, 마침내 그 장면이 아들에게 목격되고 놀랜 아들이 뒷걸음 치다가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져 죽지요. 벌거벗은 채로 카메라 엥글에 잡힌 스티브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지금까지 그의 삶을 탄탄하게 지켜주리라고 생각되었던 가족, 사회적 명망, 부,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음을 상징하지요. 결국 가족과 이별하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로 살아가는 스티븐이 안나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사랑에 대해 독백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지금 그 대사가 생각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사랑의 맹목성을 고백하는 이야기일 겁니다. 여러분도 한 번 보세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불륜적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맹목적이고 충격적인 면이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우리가 합리적으로 계산이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적 물음은 바로 그런 것이예요.


4. 결국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하겠다는 애기나 회의를 경험하지 않고 실존적 물음을 제기하겠다는 생각은 우스갯소리로 손안 대고 코 풀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죠.그런 방법이 있다면 저도 알고 싶군요.


5. 하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스티븐처럼 삶을 교과서대로 살아온 사람은 오히려 그런 충격적 경험에 쉽게 무너질 수 도 있어요. 온실에서 자란 꽃이 거친 비바람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내 방 옆의 베란다에 화분이 몇 개가 있는데, 지난 겨울이 좀 추웠잖아요. 그래서 난을 내가 밤에는 방에다 들여다 놓기도 하고 또 정성도 기울였죠. 그리고 좀 투박하게 생긴 비디오맨이라는 화초는 물도 제대로 안 주고 밤에도 추운 베란다에 그냥 방치했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겨울이 끝나가면서 이 비디오맨이 푸루죽한 이파리 사이로 선홍빛 꽃을 피우는데 사실 굉장히 놀랬어요. 정성들인 난은 비실거리는데, 이 비디오맨은 오히려 인동(忍冬)의 결실을 맺은거죠. 회의와 좌절의 경험을 무조건 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을 하면서도 자신이 본래 생각하고 있는 삶의 근본 목표(화두)를 잃지 않는 거지요. 오히려 고통의 경험은 그만큼 인생을 깊이 있게 만들어주고 여러분들의 정신의 폭과 깊이를 탄탄하게 해줍니다.


6. 저의 경험상 너무 극단을 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혹시 성격상 이런 면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양극단에 빠지지 않고 중용과 중도의 논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면서 또 그만큼 노력을 해보세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최고의 윤리적 덕목을 중용에서 찾았고 불교의 근본 핵심도 불락이변(不落二邊)과 같은 중도사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해요. 습관은 제2의 성품이란 말도 있지만, 반복된 습관은 좋은 성품을 길러주지요. 그리스 인들은 탁월한 성품, 고귀한 정신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습기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여러 생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몸에 각인된 습관을 말하지요. 이것을 떨쳐버리기가 정말 쉽지 않지요. 해서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좋은 습관을 나름대로 정해서 길러보세요. 나도 젊은 시절에 술, 담배에 찌들어서 살기도 했는데, 결국은 그것이 몸을 많이 상하게 하더군요.


7. 이야기가 장황해지기는 했지만 어쨋든 운명은 우리가 피할 수 없어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지요. 결국은 나의 태도와 능력에 있지 않을까요? 다시 이야기 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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