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변호사 회관>에서 열린 <서초 인문학 포럼> 강의 내용 입니다. 이날 첫번째 발표는 중국 철학을 한 이 병희 선생이 장자 강의를 했고, 나는 두 번째로 에세이 철학을 중심으로 강의했습니다. 수강생들의 분위기와 감수성이 좋았네요. 이 강좌는 두 달에 한 번 씩 진행됩니다.
1. 내가 쓴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란 소설을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철학자가 소설을 쓰나?” 같은 글쓰기라 해도 학자들의 논문 쓰기와 소설가들의 창작은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글쓰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논문과 같은 학술적인 글쓰기는 아이디어는 중요하다 해도 자기만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쓸 수가 없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증을 해야 한다. 논증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논문들과 연구서들을 검토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이런 논증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설득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에는 아이디어가 아무리 뛰어나도 논문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바로 논증과 정당화의 과정에서 논문 쓰기와 시와 소설과 같은 예술작품의 창작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다음으로 논증 과정에서 사용하는 문체는 절대로 주관적인 감상이나 감정이 실려서는 안 된다.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면 단호한 감정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감정 조차 정당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반면 소설 창작에서는 설득의 논리를 무시할 수 없어도 학술적인 글쓰기 처럼 엄밀한 논증과정이 필요하지는 않다. 학술적인 글쓰기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1인칭 보다는 3인칭의 시점에서 써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튼 학술적인 글쓰기 에서는 정당화를 위한 엄밀한 논증의 과정과 사용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언어 사용이 요구되는 데 반해, 소설에서는 창작의 아이디어와 주관적인 서술 문체 등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 둘의 차이가 적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논문을 잘 쓰는 학자가 소설도 잘 쓸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힘들고,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학자인 나는 어떻게 소설을 쓸 수 있었던가?
2. 이에 대한 해답은 바로 ‘에세이철학’에 있다. 나는 5-6년 전 부터 ‘에세이철학’에 주목하면서 이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내가 말하는 ‘에세이철학’은 A4 10장 짜리 학술 논문의 글쓰기와 다르다. 학술 논문을 쓰려면 다양한 형태의 레퍼런스를 동원해 각주를 채워야 하지만, ‘에세이철학’은 이런 형태의 각주 부담을 벗어 버린다. 쉽게 말하면 남의 철학이나 사상에 올라타서 글을 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철학’은 소설 창작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1인칭 시점을 유지한다. 반면 ‘에세이철학’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당화하는 논증 면에서는 기존의 학술적 글쓰기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한 각주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이 기준에서 본다면 과거의 철학자들, 이를테면 로크나 흄, 파스칼과 루소 등은 대부분 에세이 철학자들이라 할 수가 있다. 내가 말하는 ‘에세이철학’은 “자신의 삶과 시대를 배경으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 비판과 논증의 과정, 이른바 설득의 논리가 치밀하게 동원된다. 이런 의미에서 ‘에세이철학’은 통상적 의미의 에세이와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에세이 철학의 정체성과 관련해 분명히 정리해 둘 부분이 있다. “과연 수필도 에세이 철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무엇보다 나의 에세이 철학은 기존의 에세이 철학과 다르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한국의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활약하던 유명한 에세이 철학자들이 이 장안의 지가를 높인 적이 있었다. 이들은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신변잡기를 대상으로 에세이를 썼다. 이들 모두 대학의 현직 철학 교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의 에세이를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학교수가 썼다 하더라도 신변잡기에 관한 에세이를 철학에 포함 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널리 암송되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저 그렇게 존재하던 것, 나와 무관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던 것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는 경험이다. 수필은 이런 ‘의미화’(signification)에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고, 그 점에서 앞서 말한 세분들의 수필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수필에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분들의 수필 철학은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의 차원에까지 끌어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보편성의 차원을 무시한다면 철학은 비트겐슈타인도 비판했던 '사적 언어'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사실 내가 그분들의 수필 철학과 차별하고자 하는 보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는 철학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의미화'(signification)와 이론 외에도 '비판'(critic)에 있다고 본다.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철학의 추상개념이 수필 속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대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수필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회와 역사를 담지 못한 채 기껏해야 '솔직함'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앞서 말한 선생들의 수필 철학에서도 사회와 역사가 들어오지 못하고, 기존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포괄적 수준에서 이야기는 해도 이론적 형태로 정형화되기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서양철학의 역사는 칼만 들지 않았지 언어로 이루어진 ‘살부(殺父)의 역사’이다. 그들은 이런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사를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철학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에세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우리 사회와 우리 삶, 그리고 시대에 관한 우리 생각을 우리 언어로 표현하자!”는 데 있다. 나는 결코 배타적인 쇼비니스트도 아니고, 막무가내식 회의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본다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철학적 활동은 자기 언어, 자기 생각, 자기 시대가 없이 남의 생각과 남의 언어, 남의 시대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철학들과 부단히 싸우고 있고, 우리 언어를 우리 삶 속에서 찾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은 철학의 다른 어떤 속성보다 내가 중요하는 요소이다.
3. ‘에세이철학’은 학술적인 글쓰기와 변별되는 한편 소설과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 학문적 글쓰기가 객관성과 보편성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 언어를 사용하기 어려운 반면, 3류 소설가라 할 지라도 순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언어를 기초로 소설을 쓴다. 다시 말해 소설은 남의 사상에 올라타서 남의 언어로 표현하려 하지 않는 점에서 주체적인 글쓰기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세이철학’도 철저히 주체적인 글쓰기에 치중한다. 또한 ‘에세이철학’은 추상 개념을 남발하기 보다는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철학자 자신의 삶과 사회 그리고 시대를 글쓰기의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철학’은 한국의 다른 어떤 철학들 보다도 주체성이 강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철학’이 이럴 수 있는 것은 그 사상적 뿌리가 ‘일상’에서 도를 구하는 당나라 선사 들에 있기 때문이다. 당의 선사들은 밥짓고 물긷는 데도 도(道)가 있다고 하면서 초월적인 도를 강하게 부정한다. “부처가 있으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있으면 조사를 죽여라!”(살불살조殺佛殺祖)는 임제 선사의 추상같은 말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선(禪)의 강한 비판 정신을 보여 준다. ‘에세이철학’은 무엇보다 이런 비판과 현실주의를 중요시한다.
아울러 ‘에세이철학’은 일상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건져 올리다 보니 철학의 고유한 문제들 이상으로 문학과 예술, 사회와 정치, 영화와 미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19세기 학문이 쌓은 장르 간의 철벽 들을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현재를 부정하는 ‘초월’이 아니라 장벽으로 상징되는 전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에세이철학’이 다른 어떤 철학 들보다 사유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기반한 철학임을 보여 준다. 에세이 철학은 ‘죽은 철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철학’을 추구한다.
4. 나는 ‘에세이철학’을 통해 장르를 넘나드는 글을 쓰다 보니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이란 소설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은 내가 평소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문제의식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해보고자 한 것이다. 서구의 68 혁명은 전후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들에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부조리에 대해 최초로 제기된 사회적 저항이라 할 수 있다. 혁명 이후 이른바 68 세대들은 68 혁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철학적/사상적 성과물을 낼 수 있었다. 프랑스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그리고 하버마스 류의 철학들은 이러한 성과물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1980년대도 서구의 68혁명 못지 않은 커다란 사회 변혁을 경험했다. 한국은 1980년도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은 이래 권위주의 군사정부에 대해 저항하면서 끊임없이 사회변혁을 추구했다. 대학가는 매케한 최류탄 가스에 뒤덮였고 전경들의 군화발에 밟혔지만, 마침내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1987년 민주화를 얻어 내었다. 이 당시 한국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 시대는 드물게 보는 한국사회의 지적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지금 이 시대를 과거에 대한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있을 뿐 서구의 68세대처럼 자신들의 철학을 생산하는 토대로 삼지 못했다.
1970년대에서 2020년대에 이르는 <그대에게 가는 먼 길> 2부작은 -현재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1부작만 출간되었다- 이 격동의 시대를 산 한 철학도의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 시대가 갖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해보고 싶었다. 한국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서구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 세대는 직접 그 시대의 한 복판을 통과하면서 그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이 소설 속에는 시대의 변혁 운동 과정에서 철학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가라는 철학도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우리가 갖는 보편적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경험이 이른바 한국철학을 정립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을 탐색해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속에 있는 ‘그대’는 특정한 인격체라기 보다는 고통과 고난을 겪은 한국인들의 시대 체험을 통해 지향하는 철학이고 ‘먼 길’은 그런 작업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끝나지 않는 지난한 작업임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철학은 사유 속에 포착한 그 시대”라는 G.W.F Hegel의 말처럼 개인적으로 이러한 작업은 나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