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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Aug 19. 2023

왜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가?


Why Koreans? 시리즈 5탄



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법정에서 증인을 택할 때 반드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는 것은 절대 위증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신과의 약속이고,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경우에서도 그 약속을 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는 이처럼 인간 행위를 규제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 그들이 종종 'Are you pormiss?'라고 할 때는 지켜도 그만이고 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그만큼 약속은 믿음과 신뢰의 차원이기 때문에 절대 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묵시적인 사회적 합의이다. 그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하지 않는다는 경계는 칸트가 '정언명법'으로 규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칸트에게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는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임의로 판단할 수 있는 가설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정언명법을 말할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도덕 명령인 것이다. 칸트의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떤 이는 거짓말이 주는 긍정적 효과를 고려해서 정언 명법의 절대성을 부인하려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일제 식민지 시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일본 경찰을 피해서 도움을 청해 올 때 그는 독립군의 행방을 묻는 일본 경찰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라는 딜레마적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칸트는 이런 경우에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칸트의 이런 주장은 서양의 지성사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은 신과의 약속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본다. 만일 거짓말을 수시로 하게 된다면 일시적인 이익이 있을 지 몰라도 사회 전체가 불신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해 입는 전체적인 손실이 더 클 수 있다. 신뢰(Trust)는 오늘 날 사회적 자본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믿음이 약한 사회는 그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훨씬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오래 전 그리스 사회에 등장했던 일군의 사회과학자 집단인 소피스트들(Sophists)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소피스트들에게는 참과 거짓의 경계선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 상대주의와 다양성을 강조하는 소피스트들에게는 절대적인 참도 없고 거짓도 없는 것이다. 나에게 참인 것이 너에게는 거짓일 수 있고, 한 사회에서 옳다고 받아들이는 도덕이 다른 사회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화 상대주의가 일반화된 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러한 도덕의 상대성, 진리의 주관성을 주장한 소피스트들과 논쟁을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적어도 그 사회는 지켜야 할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경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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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논리를 한국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왜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은 한 이유가 있다. 한국인들은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만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식사 한 번 하지요. 제가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서 조만간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냥 편의상 으례 하는 말일 뿐이다. 한 마디로 약속을 건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I promise'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는 크게 다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법정에서 선서를 할 때도 다르지 않다. 법조계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위증이 위법한 것이고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위증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법관도 증인의 증언을 심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은 아니겠지만 그 신뢰도가 낮다는 의미인 것이다. 서양인들의 경우에도 위증이 있겠지만 성경에 손을 얹고 증언을 할 때의 의미와는 판이하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거짓말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거짓말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쉽게 관용하고 관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선거할 때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수많은 공약(公約)을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런 공약을 했는지 기억 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허공에다가 한 헛 약속(空約)이나 다름 없다. 유권자들이 이런 행태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는 데 유권자들 역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 있고, 그것을 개선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거짓말에는 공적으로 책임 있는 인사들에게도 수시로 나타나고 있다. 입법하는 국회의원들이나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의 관료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법적 판단을 하는 법원 조차도 거짓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런 현실은 법관과 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크게 낮은 정황에서 미루어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살면서 거짓말을 절대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빈도수가 중요하다. 한 사회가 불신 사회에 빠진다면 사회적 비용이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 신용지수가 낮은 사람의 이자율이 높듯, 사회를 유지하는 데도 똑 같다. 한 사회에서 믿음과 신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인데, 이런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했다 해도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해줄 수는 없다. 삶에 있어서 어떤 절대적 가치나 기준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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