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Koreans? 6탄
교토 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 일본내 대표적인 지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수년 전 그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2017)를 출간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가 있다. 조선이 '철학의 나라'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조선에서 오직 하나의 리(理)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자 독식하는 현상을 밝힌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 이후 현대에까지 이르러 오늘 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진영논리'도 그런 현상을 대표하고 있다. 그는 <조선 사상사>(도서출판 길, 2021)라는 책에서 일본인의 사유방식과 한국인의 사유방식을 비교해서 두드러진 특징을 기술한다. 이러한 기술은 과거 루스 베네틱트가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 일본인의 대표적인 특성으로서 한편으로는 평화를 상징하는 국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사무라이의 칼로 상징한 것과 비슷하다.
오구라 기조는 한국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사고는 '뒤집기'(개변)라고 보는 반면 일본인의 사고는 '브리꼴라쥬'라고 본다. 일본 문화가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문화에 대해 브리콜라주(수선)적인 포섭 방법을 취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조선은 외부로부터 도래한 사상이 기존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변을 추진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주도 사상으로 사회 변혁을 시도했고,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면서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근대에 기독교가 새로 들어오면서 그런 역할을 했고, 이런 전통은 현대에 들어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공산주의라는 사상(주체사상)이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사상이 연속성을 띄기 보다는 새로운 사상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고 개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하나를 쟁취하려는 싸움이 득세하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써움은 목숨을 건 사생결단 식으로 이루어질만큼 격렬해진다. 조선시대 사색당쟁에서 지면 삼족이 멸해지는 전통은 최근의 조국 집안을 도륙내는 검찰의 행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뒤집기와 부정은 현대인의 한국인들에게도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드러난다. 진영논리가 일상화되면서 지역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도능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남여 간 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 진보와 보수 간 갈등 등 거의 전반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서 했던 일 중에 아무리 좋은 일 조차 다 뒤집어 팽개치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 한다. 최근 김훈 작가가 '내 새끼 지상주의'를 중앙일보에 싣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비난과 증오를 내뱉는다. 구글이나 페이스 북에 보면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김훈에 대해 저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반응이다. 김훈 작가가 핵심으로 생각한 '내 새끼 지상주의'와 '공교육의 죽음'은 아예 관심도 갖지 않고, 오직 그가 조국 교수 부부를 소환한 단 두 줄이 문제삼기 때문이다. 사실 김훈의 이런 논지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빠졌을 뿐 아니라 공교육의 문제를 학부모의 민원으로 치부한 데서 심각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유리한 비판의 호재를 두고 반대세력들은 오로지 조국사수!의 투쟁 대열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의 정도가 심해지더니 개딸 등 강성 지지층은 드디어 과거 이문열의 책을 태웠던 악몽을 일깨우려는 듯 김씨의 책을 갖다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한국과 같은 대표적인 문명 국가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 분열 상황에서 중도나 양비를 이야기하면 너무 쉽게 사이비나 회색분자로 매도된다. "양끝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불락이변(不落二邊)은 불교의 중도 사상의 핵심이고, 중용은 유학의 오래된 경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래 전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을 강조한 바 있다. 중용은 극단이 빚는 악덕, 이를테면 지나침과 모자람과 같은 악덕을 피하기 위한 중간의 논리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산술적 의미의 중간이 아니라 실천적 이성의 지혜를 요구하는 논리이다. 무엇이 만용이고, 무엇이 비겁인 지는 때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용기라는 중요의 덕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것은 삶의 쓰고 단 맛을 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통찰이다. 반면 극단적 사고는 쉽게 감정에 휘둘리는 이른바 초짜들의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선명 투쟁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벼랑 끝 논리가 전부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삶의 지혜와 통찰로 끌어 올리지 못한 셈이다. 한국인들은 도대체 언제 쯤 철이 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