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철 Aug 19. 2023

문자와 기록


조선을 기록의 왕국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는 무려 5백 년 동안 왕실 정치의 세세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승정원 일기와 조선 왕조 의궤(儀. 軌) 등은 단편적인 기록물이 아니라 시리즈로 이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권력을 가진 지배층에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한문으로 작성돼서 번역이 되기 전까지는 소수의 전문가들만 접근할 수 있었다.




임진·병자의 엄청난 변란 기간 동안 언어도단의 고통을 더 크게 겪어야 했던 것은 지배층보다는 피지배층의 양민과 노비들, 그리고 여성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남긴 기록은 드물다. 아무래도 한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된 탓이 컸을 것이다. 이럴 때 한글 사용이 일반화되었더라면 훨씬 유리하지 않았을까? 집안 어른의 피난기인 『용사일기』(도세순 지음, 도두호 역)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임진왜란을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람들의 피난 체험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만큼 직접 체험의 기록이 중요한데 한문 사용자 아니고서는 읽기가 힘들다. 그것을 돌아가신 내 친구 도두호가 번역해서 자비 출판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면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문맹률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인구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문맹 수준에 가까웠다. 나의 모친이 1922년생인데, 평생을 글자를 모르고 사셨다. 나는 중학교 시절 모친이 글자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는 놀랐었다. 부친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도 오랫동안 계셨다. 부친은 모친에게 글자를 가르켜 줄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평생 안타깝게 여기는 일 중 하나가 모친이 한글을 깨우치도록 돕지 못한 것, 두 번째는 그 삶을 구술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친은 말씀을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잘하셨다. 말년에는 교회에도 다니셨는데 성경의 특정 구절이나 찬송가 암송을 잘하셨다. 한번은 모친이 가족 행사에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적이 놀랐다. 너무나 조리 있게 기도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평생 고생한 당신의 일생에 대해 직접 기록을 남겼더라면 어땠을까?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일제강점기에도 자신들이 당한 비참한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경우가 많지 않다. 일상적으로 일기만 썼다고 해도 기록으로 남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 혹은 학도병 문제 같은 것도 실제 경험한 당사자들이 꼼꼼하게 기록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해방 후 혼란과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사례가 많다. 여순 사건이나 제주의 4.3 사건 때도 그렇다. 전쟁이 나면서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당하고 생매장당한 사람들이 100만이 넘는다고 한다. 도저히 문명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전쟁을 이유로 벌어진 것이다. 때문에 이승만은 무고하게 양민을 학살한 지도자 순위에서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높다. 이런 사람을 국부로 존경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사건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드물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유해 발굴도 불확실한 전승이나 기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것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면 역사의 과오도 훨씬 빠르게 교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날 한국인들의 문자 해독률은 95% 수준이라고 한다. 이 정도 되면 거의 모든 국민들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읽고 쓰기 쉬운 ‘한글’과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히 글을 쓰고 읽는 것보다는 글의 뜻을 이해하는 능력(문해력)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시대라 읽을거리들이 넘친다. 하지만 깊이 있는 독서가 뒷받침되지 않아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에는 많이 노출이 되어 있어도 책은 별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록을 위해서는 글쓰기가 중요한데, 이 점에서는 거의 훈련이 안 된 경우가 많다. SNS에도 전혀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문장이나 비논리적인 글이 올라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은 자꾸 쓰다 보면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 이제는 기록이 문자를 독점한 소수의 지배자들이나 전문가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현대는 기록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시대라는 점에서 기록에 남을 만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