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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기일

by 이종철

아침에 막내한테서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까마득히 생각도 못하고 있었군요. 사는게 뭐 그리 바뻐서 어머니 돌아가신 날도 기억 못하고 있는지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오늘 하루라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야겠습니다. 몇년 전 '어버이날'에 쓴 글입니다.


"오늘이 5월 8일 '어버이 날'입니다. 따지고 보니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살아 생전에는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사진 속에서는 아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계시네요. 그래도 말년에는 두 분 사이가 많이 좋아지셨던 것 같아요. 모친이 심장병으로 앓다가 82살에 돌아가시고, 그후 40일 만에 94살의 부친이 따라 가셨습니다. 백년 해로 하시다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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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날 두분이서)


나의 부친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지적인 호기심도 굉장히 강하셨습니다. 두 분이 함께 사시던 친가에 들를 때는 90이 넘은 부친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 현실이나 과학 현상 같은 것을 가지고 묻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곤 했었지요. 연세가 90이 넘었는데도 저한테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아마도 나의 지적 호기심은 상당 부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영향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부친이 큰 공부는 하시지 않았지만 두루 많이 알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나의 모친은 불행히도 평생 한글을 모르고 사셨습니다. 내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 모친이 한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놀랬습니다. 모친도 한글을 깨우치고 싶어하셨지만 기회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지요. 내가 모친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평생 후회가 되더군요. 모친은 한글은 몰랐지만 기억력은 비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젊었을 적에 갈치를 떼다가 머리에 이고서 행상을 다니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장사를 하려면 금전 계산도 해야 되고, 사람들 이름도 장부에 다 적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모친은 그런 작업을 하지 못하셨지만 모든 것을 머릿 속 기억에 의존해서 했지요. 나는 그 부분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입니다. 말년에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교회를 다니시고 집사 호칭까지 받으셨는데 성경 구절도 잘 기억하시고, 특히 기도를 잘 하셔서 무신론자인 나도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모친은 그 당시 한국의 여인네들이 그렇듯이 절기에 따라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 준비도 하고, 그야말로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당신 혼자서 5남매를 거두었습니다. 5남매 중 세번째인 나는 특히 어머니에게 빚을 많이 지었습니다. 내가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리다 보니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보다 나에게 훨씬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는 내 자신의 몸 상태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중학교를 흑석동에 있는 중대부속 중학교에 뺑뺑이 돌려 배정받으면서 등하교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신길동 노인정이라고 하는 곳에 살았는데,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까지 거진 1.5킬로를 걸었지요. 새벽에 그 길을 어머니가 매일같이 나를 업고서 정류장까지 다니셨습니다. 5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새벽 골목길 붉은 가로등이 켜져 있는 곳을 어머니 등에 업혀서 다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나는 정류장에서 나를 업어 태우려는 어머니가 너무 챙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은 그렇게 업어서 나를 만원 버스에 태우는 것을 내가 발로 밀쳐서 어머니랑 함께 도로에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만큼 불효를 저지른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집니다. 그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 내리면 다시 그곳에서 흑석동의 중학교까지 2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거의 초인적인 거리라 도저히 다니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이 먼거리를 다니면서 내가 정말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을 했지요.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때는 마침 대한항공 리무진 버스를 운전하던 친구 아버지가 우리들을 학교까지 태워주어서 비교적 덜 고생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이 너무 고마워 늘 선물을 바리 바리 준비해서 가져다 드리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내가 중학교를 처음 들어가서는 공부를 비교적 잘했는데 결정적으로 2학기 올라갈 때 담임 선생이 성적표에 나를 평가하면서 '말이 많고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라고 적은 것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실어증 비슷한 경험도 하고, 중학교 내내 제대로 공부도 못하면서 등하교로 고생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고생하면서 나를 등교시킨 어머니 때문에라도 공부를 잘해서 자랑스러운 어머니 상을 드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는 마음이 큽니다. 지금도 모친을 생각하면 한없이 죄송한 느낌입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는 별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을 많이 흘렸지요.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지금도 내 서재에 걸려 있는 모친 사진과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후회를 많이 할 뿐입니다. 정말 나는 한 번도 모친이 원하는 삶을 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모친은 늘 내가 어떻게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지, 제대로 결혼이라도 하고 살 수 있을지 걱정을 한 시도 놓지 않았지요. 나중에 내 처를 만나서 결혼하기로 하고 양가 상견례를 했을 때 갑자기 장모님이 내 불편한 다리를 거론 한 적이 있었지요. 물론 장모님은 선의로 다리도 불편한데 잘 키우셨다는 의미로 하셨을 겁니다. 그 때 어머니는 그런 자식에게 딸을 주셔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수그렸지요. 나는 그런 모습이 너무 싫어서 이 결혼 안 하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습니다. 나 때문에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가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고 생각한 것이지요. 물론 어머니가 나를 잡아서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 일로 한동안 장모님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지요. 물론 그 때문에 원산고녀 출신이고 프라이드가 무지 강했던 장모님이 나에게 많이 미안해하면서 더 잘해주셨지요. 지금은 그런 장모님도 91세가 되셨네요.


밤 늦게까지 작업을 하다가 오늘이 '어버이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미 20년이 지났지만 두 분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내 나이가 이제 60 대 후반이고, 하나 있는 딸 아이는 아직도 공부를 한다고 독일에서 자기 문제로 끙끙거리다 보니 '어버이날' 생각은 벌써 전에 접어두었습니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돌아갈 고향을 상실한 느낌이 듭니다. 부모란 아마도 자식들이 돌아와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 둥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무가 뽑혀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자식들이 돌아갈 곳도 없어진 셈이지요. 아직 부모가 살아 계시고,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나의 벗님들이여. 살아계신 부모의 존재 자체가 행복입니다. 부디 좋은 날을 보내세요."(20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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