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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는 먼 길 007

by 이종철

007. 고시원에서 내가 거주하던 방은 2층 맨 끝방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9시쯤 돼서 갑자기 내 방으로 평소 알던 선배가 뛰어 들었다. 그의 첫 마디는 ‘당했다!’ 였다. 그는 법대 학생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선배였다. 군대를 다녀온 그는 대중 연설과 선동에 탁월했다. 단과대 학장을 맡고 있었을 때 나 보고 법학과 과 대표를 맡아서 법대 분위기를 잡는 데 일조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고시 핑계로 그 제안을 물리쳤다.

“도대체 당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선배는 이대에서 열린 전국 총학생회에 참석했었다.

“총학생장들이 회의하던 이대에 경찰이 덮쳤어. 대부분 현장에서 붙잡혔고, 개중에 나처럼 도망친 자들도 있지. 나는 이대 후문 쪽 담장을 넘어서 바로 여기 법대 고시원으로 도피한 것이야” 연대 동문 쪽 후문에 있는 법대 고시원은 이대 후문과 멀지 않았다. 이곳 지리에 밝은 그는 길 건너 바로 이 고시원으로 올 수 있었다. 그가 맨끝의 방으로 온 것은 만약의 경우 바로 튈 수 있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배의 ‘당했다’는 표현은 당시 상황을 아주 잘 드러냈다. 사실 하나회가 이끄는 군부는 학생들 데모를 거리로 유도해서 호시탐탐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하나회 실권 세력의 이런 계략을 알만한 사람들은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신군부는 학생들이 서울역 회군을 단행하면서 휴지기에 들어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대에 모인 학생 지도부들을 일거에 검거하면서 뜨겁던 데모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훨씬 더 큰 규모의 희생을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1980년 5.17일 9시 너머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단 20분 만에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전격적으로 계획된 수순(手順) 이었다.


7군단 공수 부대가 광주에 내려온 시각은 5.17일 자정을 넘어서였다. 그들은 부마 항쟁을 진압한 경험이 있는 부대였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일요일이지만 학교 도서관이나 기타 볼일 보러 온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팼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자신들의 학교에서 어이없이 곤봉으로 두들겨 맡는 학생들은 일단 학교 밖으로 피했다. 100여 명 가까이 광주역 근처로 모이자 그들은 하나 같이 공수 부대를 성토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광주의 5월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상 최악의 살육으로 도배되었다.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공수 부대가 적과 싸운 것이 아니라 비무장 일반인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상을 하고 총기를 난사했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공수 부대의 이러한 만행은 처음부터 기획된 것일지 모른다. 시위대와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면 절대로 총구를 대한민국의 국민을 향할 수 없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 광주를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 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세력에게 철퇴를 내리려는 의도가 강했다. 때문에 그들은 초기부터 강경 진압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피를 본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똘똘 뭉쳐 저항했던 것이다. 한국의 1980년 대는 이 사건을 기화로 민주 대 군부 독재 간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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