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mal one으로 살아가는 법
3개월 만에 교토로 놀러 왔다. 오사카와 가까워서 놀러 오기 참 좋은 곳이다.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4개월째 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이곳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오사카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지만, 교토에서는 순수히 혼자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된다.
군 복무 시절 잠깐 읽은 적이 있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오랜만에 펼쳤다. 호텔의 라운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 3시 반까지 읽었다. 군대에서 볼 땐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일본에서 보니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독자로서 책을 읽는 것과, ’여행자‘로서 책을 읽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워킹'의 이미지가 강조됐을 뿐이지, 워홀러도 나름대로 여행자니까.) 특히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지고 있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많이 와닿았다. 어릴 때 만화책으로 접했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만화책에는 전쟁 이후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며 온갖 수난을 겪는 그의 이야기도 그려져 있지만, 읽었던 당시에는 재미있게 읽고만 넘겼었다. 하지만 ‘워홀러’로서 바라본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해외 생활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었다.
<여행의 이유>에서는 이타카로 돌아가다 외눈 거인 키클롭스를 만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용히 지나가면 될 것을, 오디세우스는 오기가 발동해 동굴에 있던 키클롭스에게 도발을 한다. 분노한 키클롭스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잡아먹고 동굴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 키클롭스에게 도발을 한다. "너의 눈을 멀게 한 자가 누구냐고 묻거든 트로이 전쟁의 영웅,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라고 전해라!" 오디세우스가 도망가자, 키클롭스는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에게 고통을 내릴 것을 호소한다. 그렇게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내내 숱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한다. 함께 했던 부하들을 모두 잃었고 본인마저 죽을 뻔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지혜를 얻게 된다. 이타카로 돌아와서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숨긴 채, 위기에 빠져 있던 가족과 나라를 구해내며 왕으로 복귀하게 된다.
오디세우스 같은 전쟁 영웅은 아니지만, 한국의 예비역 대위로서 일본 워홀 생활을 한다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워홀 초반기에는 일본인들이 나를 특별한 존재로서 봐주기를 갈망했었다. 굳이 그들이 물어보지도 않은 과거 경험이나 미래 계획을 거창하게 떠들어대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에서 온 워홀러'로서 정의될 뿐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지난 4개월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별하지 않기에 부담 없이 도전을 해 나갈 수 있고, 굳이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실수나 실패를 해도 자책 대신 배움의 연료로 활용하는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매력을 한층 더 알아간다. 일본 워홀 생활은 '나답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감사한 시간이 되어 주고 있다.
(여담)
호텔 라운지에서 쉬고 있는데, 근처에 한국인 여행객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옛날 남자 친구가 일본인이었다는 어떤 아주머니의 말이 귀에 확 꽂힌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서 보니, 아무래도 사위와 장모님의 관계로 보이는데 사위는 굉장히 신기해했다. 갑작스러운 아주머니의 폭로(?)는, 정체를 숨겼던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페넬로페에게 이름을 밝히는 장면을 연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