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결정, 사라짐이 남기는 온도
< 첫눈이 내리던 날 >
하늘이
숨을 고른 듯 멈추더니
작은 흰 점들이
조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눈은
소리 대신
빛을 데리고 왔다.
회색 하늘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서로 모르는 얼굴들이
같은 방향으로 웃었다.
나는
손바닥 위에 눈송이를 받았다.
투명해지기 전
아주 잠깐,
그 모양을 기억하려 애썼다.
첫눈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선명하게 남는다.
오늘,
나는 하늘이 건네준
첫 편지를 받았다.
<눈의 결정이 녹는 시간>
눈은 조용히 내립니다.
손을 내밀면 스치듯 닿고,
닿는 순간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라졌다고 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녹을 때
손바닥에 잠시 머무는 미세한 온기,
그 따뜻함이 오래 남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의 온도를 남기고 갑니다.
기억도 그렇습니다.
너무 차갑게 느껴지던 순간도
시간 속에서 녹아내리며
부드러운 결을 남깁니다.
가장 아팠던 말도
가장 빛났던 하루도
결국엔 같은 속도로 녹아
마음의 흐름 속으로 스며듭니다.
우리는 종종
사라지는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붙잡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서,
손에서 놓이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하지만 진짜 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마음을 건드리지 않을 때입니다.
눈이 녹는 동안
잠시 스며드는 그 온도처럼
떠난 것들은
다른 모양으로 우리 안에 남습니다.
어떤 기억은 물처럼,
어떤 순간은 바람처럼,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빛처럼.
형태는 달라져도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흩어져
우리의 안쪽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할 뿐입니다.
눈이 녹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에도
아직 남아 있는 온도가 있다는 것을.
그 온기가 우리를
다시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녹아내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깊은 땅으로 스며듭니다.
그곳에서
다음 계절의 온도를 준비합니다.
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스스로의 모양을 모르는 존재입니다.
공기와 온도,
바람의 속도,
기압의 미묘한 떨림에 따라
결정은 끝없이 바뀌고,
마침내 지상에 닿기 직전에서야
잠깐 자신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늘 이별을 향해 있습니다.
따뜻한 손바닥,
숨결 한 번만 닿아도
눈의 결은 가장 먼저 사라집니다.
그 순간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손 위에 떨어진 작은 눈 한 송이가
천천히 흐릿해지고,
가장자리가 물처럼 번지며,
마침내 투명한 점 하나로 남는 그 과정.
그 사라짐은
슬픔이라기보다
어떤 고요한 해방처럼 느껴졌습니다.
형태를 잃어가는 동안에도
눈은 아프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갈 곳을 알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녹아내립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더 깊은 자리로 스며드는 일일지 모릅니다.
땅속으로,
낡은 흙 사이로 스며든 물은
뿌리의 마른 부분을 적시며
보이지 않는 생명을 깨워냅니다.
겨울의 마지막 눈이
가장 이른 봄을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늘 뒤늦게서야 깨닫습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붙잡고 있던 모양이
흩어지고,
감정의 가장자리가 물처럼 번질 때
우리는 대개 두려워하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비로소 다른 생이 자라납니다.
견디지 못해 흘린 눈물도
언젠가 흙 속의 물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적실 수 있겠지요.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조용한 순환의 입구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서
조용히 녹아내린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시작을 향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흔적 없이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모든 소멸은
언젠가 돌아올 온도를 품고 있습니다.
녹아내림은 끝이 아니라,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는
가장 조용한 시간입니다.
눈이 사라진 자리마다
새로운 마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온도로 남는 일입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조용한 따뜻함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오늘 스르르 녹아내린 감정이 있다면,
그 끝을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리를 옮겨
우리를 다시 살릴 물이 되고 있을 테니까요.
by 《그 자리에 핀 마음》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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