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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무의미 카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쓴 맛

by 숨결biroso나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도시의 가장 깊은 밤,
간판도 불빛도 없는 작은 카페 안에서
나는 나를 잃는 맛을 처음 마셨다.

미지근한 잔 안의 검은 액체는
빛을 삼키듯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고,
표면에는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그림자들이
아무 기척 없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간 순간,
내 이름은 가장 먼저 끊어졌다.

평온은 느리게 퍼졌다.
얼음장 아래의 고요처럼 차갑고,
어떤 감정도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그 상태는 고통도 후회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마저 지워버렸다.
마치 무중력의 흑색 공간을
표정 없이 떠다니는 생명처럼
나는 현실의 표면에서 멀어져 갔다.

그때 깨달았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실패나 수치가 아니라,
그 모든 감정이 사라진 뒤 남는
완벽한 무의 공백이라는 것을.

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 주워 담기 시작했다.
도시의 골목마다
검은 액체의 잔해처럼
내 과거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을 하나 집을 때마다
고통은 맹수처럼 나를 물었다.
그 고통이 깊어지는 자리에서
내가 버린 ‘나’의 기척이 먼저 움직였다.

내 숨을 따라
아주 미세하게 뒤틀리는 공간,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목소리 아래 깔린 음색을 따라 하고 있었다.

선사가 건넨 커피는
구원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어쩌면 세상 어느 누구도
끝내 답하지 못했던 질문.

“당신은 왜 고통을 잊는 순간부터
살아 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의 결말에 닿기 위해
마지막 잔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 한 방울은
나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혹은 다시 나로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

평온은 차갑게 위장된 환상일지 모른다.
쓴맛을 마주해야만
우리가 품어야 할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든 여정은
문턱조차 흐릿한 '무의미'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만약 고통을 지워주는 커피가 있다면?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만들어준 것이었다면?


당신이라면, 그 커피를 마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잊고 싶은 밤을 품고 살아갑니다.
무의미 카페는 그 순간의 당신을 위해 열리는 작은 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다시 찾는 길을
낮고 조용하게 비춰주기를 바랍니다.



by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쓴 맛》 ⓒbiroso나.



다음화 예고


그날 밤,
차준은 잔의 표면 어딘가에서
자신의 얼굴과 닮았지만
전혀 자신이 아닌 무언가의 기척을 느낀다.

그 기척이 무엇인지 알기엔 너무 이르고,
외면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
도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어둠의 문을
조용히 열기 시작한다.

1화. 단 한 잔의 불가능한 맛

《무의미 카페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쓴맛》은
망각과 기억, 평온과 불안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현대인의 존재를 그린 감각적 서사입니다.


#무의미카페 #참을수없는쓴맛 #존재의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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