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 한 잔의 불가능한 맛〉

무의미 카페, 고통을 지워주는 커피가 있다면?

by 숨결biroso나


만약, 고통을 지워주는 커피가 있다면?




1화. <단 한잔의 불가능한 맛>


사라지고 싶은 밤마다 더 선명해진다.

나의 또 다른 얼굴이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차준'에게 밤은 고요가 아니었다.
불빛이 꺼지고 도시가 숨을 고르는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낮 동안 밀어두었던 실패들이
금속성 울림을 내며 서로 충돌했다.


눈을 감으면 기억이 밝아졌고,
눈을 뜨면 현실이 흐릿해졌다.
그는 마치 자신의 잔해를 떠밀고 다니는
회색의 무중력 물체처럼 존재했다.


밤은 존재 그 자체가 발산하는 소음이었다.
무형의 파편처럼 그의 머릿속에 흩날렸고, 잠은 언제나 그 파편들 사이에서 찢겨 나갔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밤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는 사라지기를 바랐다.
흐릿해지고 싶었다.
온기 없는 투명함이 되기를 갈망했다.


자정이 되면 침대에 누운 채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제발,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해줘.”



새벽 세 시.


도시는 꺼진 촛불처럼 식어가고 있었고,
차준은 자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빛 없는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도시는 잠들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깨어있었다.
골목을 비집어 나오는 빛 하나가 그의 발끝을 멈추게 했다.

익숙한 건물들 틈에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간판 하나가
깜빡이듯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의미 카페>


검은 판 위에 올려진 그 이름은
표식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무의미.”....


세 글자는 차준의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건드렸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빨려들듯 그 문을 향해 걸어갔다.


숨을 몰아쉬며 문을 밀었다.

그 순간,
오래 묵은 어둠이 마치 숨을 들이켜듯 그를 삼켰다.

카페 안은 비현실적인 침묵으로 가득했다.
벽은 숯빛, 조명은 희미했고,
공기에는 커피인지, 흙인지, 혹은 오래 묵은 기억의 냄새인지 알 수 없는 향이 깔려 있었다.


흰 머리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늙었으나 낡지 않은 사람.

세월에 닿아 있으면서도, 세월에 닳지 않은듯한 그런 얼굴.


이 세상과의 접점이 거의 끊어진 사람만이 지닌
묘한 깊이의 눈빛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노인의 목소리는
이미 누군가 오래전에 적어놓은 문장을
그저 읽는 것처럼 담담했다.


차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한 문장을 꺼내고 있었다.


“…​ 저의 모든 고통과 짓누르는 모든 의미를 잊게 해주는 커피가 있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단 한 잔만 가능합니다.”


“이 잔은 당신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작은 찻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속에 담긴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액체.

‘커피’라는 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딘가 세계의 가장 오래된 잔해 같은 빛깔


차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갈망의 경계는 오래전에 무너져 있있다.


그가 잔을 들자

손끝까지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에 가까운 절망이었다.


잔을 입술로 가져갔을 때,

얇은 크레마가 깨지며 짙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액체가 아닌, 무언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마지막 결심을 내렸다.



첫 모금.


혀가 뜨거운 쇠에 닿은 듯 마비되었다.

식도는 타들어갔고,

숨이 멎는 듯한 쓴맛이

온몸의 핏줄을 따라 퍼졌다.


그 순간

그가 외면해온 모든 것들의

기억이 다시 짙게 스며 들었다.


실패.
버려진 약속.
타인의 시선.
사랑의 잔해.
스스로에게 품었던 끝없는 혐오.

하지만 쓴맛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완전한 무(無)' 였다.

공허는 두려움의 얼굴도, 고통의 냄새도 없었다.
그저…
모든 감정이 꺼진 방처럼 조용했다.


‘아, 드디어…’


기억은 가장자리부터 희미해졌다.
이름도, 얼굴도, 과거도
모두 물속으로 가라앉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던 평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 괜찮아지겠지.’


그는 자신이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기억의 테두리가 흐려지고,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얼굴처럼
자기 또한 색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사라지려 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새벽의 빛을 뒤에 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누군가였다.

똑같은 걸음.
똑같은 얼굴.


그러나
눈빛만은 완전히 달랐다.

차준이 방금 버린 모든 기억들을
한데 붙여 만든 것처럼
날카롭고 생생했다.


그 눈빛에는

차준이 방금 잔에 던져버린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고통, 분노, 욕망, 지워지지 않는 진실들.


그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안녕, 차준.”


“내 이름은 차이(差異).”



그 목소리는
차준이 밤마다 들었던
그 ‘존재의 소음’과 똑같았다.


차준은 숨이 멈추는 듯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지우려 했던 모든 감정과 기억이
오히려 더 선명한 존재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차이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나는 네게서 떨어져 나온 모든 의미들이다.

네가 버린 고통과 욕망과 진짜 얼굴들.”


"네가 존재하기를 포기했으니,

네가 버린 내가 대신 너의 삶을 살아주지.”



차준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사라져가던 손끝에서
잔의 미세한 온기가 다시 느껴졌다.

아주 작은 미열.
그러나 그 온기가
차준을 안개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붙잡아두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고통을 피해 마신 한 잔의 커피가

당신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쓴맛》은

잊음과 기억, 평온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는

우리 모두의 밤을 그립니다.


도시의 가장 깊은 밤,

문턱조차 희미한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요.




우리는 모두 잊고 싶은 밤을 품고 살아갑니다.
무의미 카페는 그 순간의 당신을 위해 열리는 작은 문입니다.


<무의미 카페>의 여정은
고통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다시 만나는 길입니다.


이 이야기가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길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자신을 다시 찾는 길을
낮고 조용하게 비춰주기를 바랍니다.



by《참을 수 없는 존재의 쓴 맛》ⓒbiroso나.




다음화 예고


기억이 사라져 가는 어둠 속에서,
차준은 마지막 남은 감각 하나
잔을 쥔 손의 온도를 붙잡는다.

그 미묘한 따스함이
그를 현실로 끌어낼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숨결로 쓰는 '비로소나'입니다.

브런치에 글쓰기 시작한 지 어느새 6개월이 되었네요. 부족한 글임에도 늘 함께해 주시는 글벗님들께 깊히 감사드립니다.^^


새 브런치북으로 인사드립니다.
이번 북은 소설처럼 흐르고 에세이처럼 잠기는 한 사람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한번도 써보지 않은 방식이라 낯설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무의미카페 #참을수없는쓴맛 #존재의불안


keyword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