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감정 없음의 얼굴
나는 종종 말했다.
“요즘은 아무 감정도 없어.”
하지만 그건, 감정이 진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느껴야 할 순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억지로 붙인 말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도 벅차오르지 않고,
서운해야 할 때조차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는 느낌.
슬픔도 기쁨도 어딘가 멈춰버린 것 같은 날들이었다.
감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나와의 거리를 조정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럴 때면 마음은 꺼진 화면 같았다.
반응도 없고, 출력도 없고,
모든 감정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고장이 아니라 변화였다.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는 감지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사람들은 감정을 ‘반응’으로 오해한다.
표정, 눈빛, 말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움직임만이
감정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감정은 그보다 훨씬 오래,
훨씬 더 조용한 속도로 움직인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가
왠지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진짜 고요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감정이 반응을 멈춘 채
어딘가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나도 모르게 말수가 줄고,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면
감정은 이미 내 안 어딘가를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던 거다.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을 뿐.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인식이 늦춰졌을 뿐이었다.
예전에는 슬픔이 눈물이었고,
기쁨은 웃음이었고,
사랑은 설레는 심장이었다.
그 감정들은 언제나 반응으로 존재했다.
표정, 눈빛, 말투, 몸짓....
그 모든 게 감정을 외부로 ‘보여주는’ 언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슬픔은 말보다 정적에 가까워졌고,
기쁨은 환호 대신 오래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으며,
사랑은 표현보다 무언의 배려로 남았다.
감정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더 이상 드러나지 않고,
더 조용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감정은 옷을 바꿔 입었고,
나는 여전히 그 안에 살아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사실은 그것이 모양을 바꿔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슬픔은 무표정 속에 숨어 있었고,
분노는 과묵함으로, 외로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침묵의 습관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감정은 우리가 배운 형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때로 감정은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시간의 결을 따라 옅게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 감정에 휩쓸려 살아가기도 한다.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감각이 바뀌는 것.
그걸 우리는 잘 모른 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라고 말한다.
어쩌면 감정은 지금,
심장도, 폐도 아닌
숨 쉴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어깨 뒤편이나
머물다 떠나는 발끝에
아주 조용히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들리던 진동이,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감정은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언어를 아직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다르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렀고,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스며들었다.
사라졌다고 여긴 감정들은
다른 이름, 다른 얼굴, 다른 리듬으로
내 삶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변형된 채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감정을 이해하는 중이다.
지금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다.
감정은 여전히 내 안을 지나고 있다.
다만,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흐를 뿐이니까
by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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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고요는 감정의 마지막 언어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감정의 틀을 벗어난 존재의 여백을 바라보며, 그 자리를 채우는 사유의 방식을 기록한 글입니다.
#존재의경계 #무너짐의기술 #감정해체에세이
*<숨결로 쓰는 biroso나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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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 《엄마의 숨》
2) 월 《별을 지우는 아이》
3) 화/ 토 《78개의 마음》
4) 수/ 금 《다시, 삶에게 말을 건넨다》
5) 수/ 토 《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
6) 목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7) 목/ 일 《가만히 피어나는 마음》
8) 금 《아무 것도 아닌 오늘은 없다》
9) 일 《말없는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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