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의 방식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 감정도 없었던 건 아니다.
때로는 고요가 먼저, 감정을 대신해 말을 건넨다.
누군가의 조용한 뒷모습에서, 눈빛 한 줄기에서, 문득 전해지는 체온에서.
어느 날 문득, 나는 아무 말 없이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았다.
떠난 사람을 배웅하는 자리였고, 남은 사람의 마음엔 오히려 단어보다 고요가 가득했다.
말을 꺼낼수록 감정은 도망가고, 침묵할수록 감정은 자리를 잡았다.
이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더 깊어졌다.
감정은 점점 줄어드는 게 아니다.
그저 그 감정이, 더 이상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을 뿐이다.
우리는 종종, 감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음’ 일 때가 많다.
사랑, 슬픔, 죄책감, 기쁨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그 순간, 감정은 조용히 자리를 바꾼다.
말의 언어에서, 고요의 언어로.
그 고요 속에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선명한 형태로 존재한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그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방식으로.
가끔은 소리 없이 들려오는 감정이 있다.
그건 누군가의 숨소리이기도 하고,
차오르지 않은 눈물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침묵 앞에서 어색해하며 질문을 던진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하지만 진짜 감정은,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감정을 꼭 말로 옮겨야만 존재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말보다 느린 언어, 말보다 오래 남는 언어는
언제나 고요였다.
가끔 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괜히 혼자 조용한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말없이 앉아본다.
아무도 묻지 않고, 나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그제야 조금 알게 된다.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말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때의 감정은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아직은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은 감정으로.
지워진 줄 알았던 마음도, 고요 속에 다시 떠오른다.
기억은 묵음으로 남아 있다가, 아주 사소한 장면에 흔들리며 되살아난다.
창밖 바람이 흔든 커튼처럼,
어느 날 문득 감정은 조용히 나를 흔든다.
그 흔들림을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그저 그 순간, 가만히 앉아 듣고 싶은 날이 있다.
말이 아니라, 마음의 떨림을.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은 결국 나에게 되돌아와, 속삭이듯 자신을 드러낸다.
어쩌면 가장 깊은 감정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기에
사라지지 않고 오래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침묵은 그 감정을 보존하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니까.
그 감정은 언젠가 말이 될 수도 있고,
끝내 말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둘 모두, 감정이다.
by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 biroso나.
(다음 화 예고)
4화. 울지 않는 사람도 아플 수 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감정의 틀을 벗어난 존재의 여백을 바라보며, 그 자리를 채우는 사유의 방식을 기록한 글입니다.
#감정의기술 #고요의언어 #침묵의위로
*<숨결로 쓰는 biroso나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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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 《엄마의 숨》
2) 월 《별을 지우는 아이》: 당분간 휴재
3) 화/ 토 《78개의 마음》
4) 수/ 금 《다시, 삶에게 말을 건넨다》
5) 수/ 토 《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
6) 목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7) 목/ 일 《가만히 피어나는 마음》
8) 금 《아무 것도 아닌 오늘은 없다》
9) 일 《말없는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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