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불이 남긴 그림자
그것은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증거다.
불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한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불이 스친 자리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뜨거움은 검게 그을린 재로, 희미하게 남은 냄새로, 혹은 사라지지 않는 상처의 모양으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문다. 눈앞에서 꺼져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림자로 남는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불을 겪는다. 불현듯 타올라 관계를 집어삼키는 갈등의 불, 멈추지 않는 열망으로 스스로를 태우는 욕망의 불,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남는 상처의 불. 그 불은 모두 우리를 바꾸어 놓는다. 불길이 스쳐간 자리마다 흔적이 남듯, 상처가 지나간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한때 불길에 삼켜진 듯한 시간을 살았다. 아무리 덮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었고, 그 불은 오래전 꺼졌는데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타오르는 듯했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둠이 내리면 더 선명해지는 그림자처럼, 상처는 불현듯 드러나 나를 멈추게 했다. 그 순간마다 나는 과거의 불길을 다시 떠올리며, 여전히 그 열기 속을 걷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불이 남긴 그림자가 전부 아픔만은 아니었다. 불이 스쳐간 숲은 한동안 검게 타버리지만, 그 재 위에 새순이 돋아난다. 모닥불은 밤을 태우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따뜻한 체온으로 남는다. 촛불은 다 타서 사라져도, 어둠 속에서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한 빛으로 오래 기억된다. 상처의 그림자도 그렇다. 불길이 남긴 흔적 속에서 우리는 견딘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바람이 불면 불씨는 꺼지거나 다시 살아난다. 관계도 그렇다. 한 번의 말실수, 한 번의 외면이 불씨가 되어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불씨는 서로를 단단히 묶어주기도 한다. 상처를 나누고, 불길 속에서 함께 버틴 경험은 다시는 끊어지지 않는 끈이 된다. 불은 그림자를 남기지만, 그 그림자가 길이 되어 우리를 연결하기도 한다.
불이 남긴 그림자에서 가장 깊은 자리는 마음속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 깊숙이에는 오래된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를 두렵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더 섬세하게 만든다. 뜨거움이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우리는 다른 이의 상처를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불이 남긴 그림자는 고통의 흔적이자,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다가설 수 있는 다리다.
인생은 반복해서 불을 겪는다. 어떤 불은 우리를 태워 무너뜨리고, 어떤 불은 우리를 단련시켜 빛을 남긴다. 중요한 것은 불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이 지나간 뒤 남은 그림자를 어떻게 품어 내느냐 이다.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때, 상처는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이 된다.
오늘도 우리는 불이 남긴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증거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여전히 빛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그림자는 빛과 함께 존재하기에, 불이 남긴 어둠조차도 우리를 다시 빛으로 이끄는 또 다른 모양이 된다.
불이 남긴 그림자가 우리를 다시 일으킨다.
그림자가 있다는 건, 아직 빛이 있다는 뜻이다.
by 숨결로 쓴다 ⓒbiroso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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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지 않아도 남는 형상
《머물던 자리, 흘러간 빛》은 멈춘 듯한 하루에도 스쳐간 빛을 건네며, 삶이 남긴 흔적에서 단단함과 따뜻함을 발견하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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