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시작한 맨발 걷기 동호회 활동이 알음알음 퍼져나가면서 동네 ‘맨발족’(族)들의 성지(聖地)가 된 동백 숲길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맨발 걷기로 건강을 되찾아보려는 사람들의 간절하고도 절박한 열기가 왼 종일 차가운 흙길을 달궈보지만, 그것만으로 계절이 바뀌어 가는 것을 어찌해 보기에는 역부족이다.
겨울의 전령(傳令)처럼 잠시 왔다 간 찬바람에 지레 겁을 먹은 벚나무도, 파초선(芭蕉扇)처럼 넓은 잎으로 한껏 성장(盛裝)을 차렸던 일본목련도 서둘러 잎을 떨구고 있다. 기세 좋던 참나무들도 시린 한숨을 토하며 마른 잎새들을 떨구어 뿌리를 덮는다.
인적 드문 저녁 무렵, 숲길을 쓸었다. 댓가지를 엮어 만든 빗자루로 350미터쯤 되는 숲 속 오솔길을 저물도록 쓸었다. 쓸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니 숲은 양옆으로 갈라지고, 정결하고 고운 황톳길이 구불구불 맑은 내가 되어 내 걸음을 따라오고 있었다.
가지런히 비질한 황톳길은 정결하다는 말만으로는 형용이 안 되고, 형용할 말을 끝끝내 찾지 못한 나는 답답하여 그 답답함을 비질하였다. 그 답답함과 함께 퇴직을 전후하여 내 심중에 똬리를 틀고 있던 막막함까지 다 쓸려나간 듯 후련해졌다. 가지런하게 열린 길 위에는 어둠과 함께 가랑잎 몇 개가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폭 3미터에 길이가 250미터 되는 윗길과 폭 1미터 내외에 길이 350미터쯤 되는 아랫길까지, 합하여 600미터쯤 되는 숲길을 관리하는 것은 이 숲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의 몫이다. 숲길에서 바라는 것이 만추(晩秋)의 스산한 서정과 운치만이라면 낙엽을 쓸어 낼 이유가 없다. 다만, 차가운 이 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의 사정이 더해지면 길은 말끔해야 하고 정결해야 한다. 정취를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백번을 양보해도 조금만 스산하고 적당히 고즈넉하여야 한다.
혹여 만추의 스산하고 쓸쓸한 정경(情景)이 어떤 이의 떨쳐버리고자 하는 상심을 외려 깊게 한다면, 누군가 낙엽 밑에 숨은 돌부리에라도 부딪힌다면, 안타깝게도 이 가을의 풍경은 진한 통증으로만 기억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비질을 한다. 순번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가을 서정이 숲길을 반쯤 채울 때쯤이면 누군가 비질을 한다. 쓸고 돌아서면 어느새 수북해져 헛된 수고로움임을 알면서도 쓸고 또 쓴다.
매일 아침 아버지의 첫 일과는 안뜰과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밤새 어지럽혀진 것도 없어 어린 눈에는 딱히 쓸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건만 아버지는 거르는 날 없이 비질을 하셨다.
양은 대야의 물을 오므린 손바닥으로 툭툭 흩뿌려 흙먼지를 재운 다음 가만가만 뜨락과 마당을 어르셨다.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는 걸레질을 한 툇마루만큼이나 정결하고 차분하였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조심스런 몸짓으로 뜰과 마당을 깨우고 다독이셨다.
가난했던 날들, 무엇이라도 앞으로 당기고 끌어오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밀어내고 비우는 비질에 정성이셨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쩌면 평생 숙명처럼 끈적하게 눌어붙어 있던 가난과 그 가난보다 독한 막막함을 잠시나마 후련하게 쓸어 내고 싶었던 의식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가늠해 볼 뿐이다.
숲길을 쓸다가 멈춰 서서 아침마다 비질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빗자루가 지나간 뒤의 정결한 마당을 생각했다. 쓸고 돌아서면 금세 수북해져 헛된 수고로움이 될 줄을 알지만, 아버지의 마당처럼 정결한 길이 보고 싶어 지면, 답답함과 막막함이 켜켜이 쌓이면 다시 이 숲길을 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