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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Feb 09. 2023

꽃의 우화(羽化)

- 입춘 즈음(2) -

매미 따위처럼 꽃들도 껍질을 벗어야만 꽃이 되는 걸까?.       


입춘이 지나긴 했지만, 산속 깊은 골이 아니라도 그늘진 곳이면 어디든 어김없이 잔설이 남아있어 ‘봄이 왔다’ 하기에는 어림없고, ‘봄이 오고 있다’ 정도도 겨우 무색을 면할까 말까 한 날씨였다. 그나마 시나브로 길어진 해가 있어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에도 잿빛 산이 환하였다.     


모처럼 산에 올랐다. 얼핏 눈에 띈 길섶 생강나무꽃 봉오리가 개암 알갱이처럼 볼록했다. 이 추위에 벌써 물이 올랐을 리는 없고, 모진 겨울을 나느라 단단히도 껴입었나 보다 생각하며 가까이 가 보았다.   

       

막 탈각(脫殼)을 끝낸 듯 가지 위에 살짝 걸친 금빛 겉껍질 하나가 낙화처럼 떨어질 찰나였다. 급히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갓난아기 새끼손톱만 한 것이 참 앙증맞았다. 볕을 받아 그런 것인지 애초부터 그러한 것인지, 껍질은 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느 곳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정교한 스테인그라스의 파편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을 담았던 작은 연등의 한 조각 같기도 했다,          


찬찬히 둘러보니 어느새 절반도 넘는 봉오리들이 잔망(孱妄)스런 깃털 옷으로 치장을 끝내놓고 있었다. 나머지 것들도 조금씩 부풀고 있었다. 껍질이 벗겨지며 드러난 그 잔망스런 깃털은 순한 골든 리트리버의 가슴과 귀를 덮은 털처럼 가늘고 부드러웠다. 부드럽고 앳된 것이 참 귀엽고 얄미워 잔망스럽단 말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떨어지기 직전의 껍질들은 금빛뿐 아니라 붉은빛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찬란한 성장(盛裝)이다. 이들의 멀어짐은 찬란하였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껍질이 벗겨지는 걸 보면 혼자 새끼를 낳는 야생의 것들처럼 저 혼자 힘으로 그리 한 것이 틀림없다. 살갗을 찢은 것인지 혹은 밀어 올린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제 살 한 꺼풀을 벗겨낸다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솟는지 궁금해졌다.      

 

누가 보아도 아직은 봄이 먼데, 겁 없이 망토를 벗어젖히는 걸 보면 남모르는 소식이라도 들은 모양이다. 아니, 해마다 산 꽃 중 제일 먼저 피는 것으로 미루어 화신(花神)의 총아(寵兒)이거나, 매화꽃과 함께 봄의 전령사(傳令使) 같기도 하다.  


한 송이가 금빛으로 빛났다. 빛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황금 꽃이다. 산의 정수(精髓)가 아니라면 분명 태양의 빛 중 금빛만을 고르고 골라 뭉쳐놓은 빛의 정수임이 분명하다.   


몇 겹을 벗겨내야 꽃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저 잔망한 털옷까지 벗어던져야 할 것이다. 다만, 어떤 꽃들-특히 목련이나 매화, 산수유 등 꽃 몽우리 채로 겨울을 나야 하는-은 매미나 잠자리처럼 껍질을 벗어야만 비로소 꽃이 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 껍질이 스테인그라스처럼 화려할지라도, 연등처럼 고귀할지라도 미련 없이 저 스스로 떨쳐내야만 비로소 꽃으로 필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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