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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Apr 18. 2023

기적을 꿈꾸며 맨발 걷기 9

- ‘맨발권’에 대하여 -

저녁 무렵, 모 맨발 걷기 단체의 OO시 지회 리더인 A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청에서 관내 △△산 등산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야자매트를 깐다고 하는데, 이를 막아달라는 주민의 제보 겸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맨발 걷기 확산 운동을 하면서 모른 체할 수 없어 내일 아침 일찍 현장에 가볼 생각이라면서 공동대응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산뿐 아니라 집 근처에 있는 높고 낮은 산들 대부분이 비슷한 실정이다. 맨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 중 하나가 ‘맨발로 걸을 곳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맨발 걷기는 대부분 접근이 용이한 집 근처 숲길이나 야산의 자연도로를 많이 이용하는데, 어디를 가보아도 대부분 야자매트가 깔려있거나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맨흙을 밟고 걸을만한 곳을 찾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으로 여기저기서 비슷한 사례가 잇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2022년) 가을을 기점으로 세차게 불기 시작한 맨발 걷기 열풍은 해가 바뀌어서도 그 기세가 사그라들 줄 모르고 있는데,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환경은 열악하다 못해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는 목소리, 즉 ‘맨발권’ 요구는 점점 높아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맨발권’이란 아직은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 사람들이나 쓰기 시작한 용어로,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권리’쯤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맨발 걷기의 특성 - 이를테면 반드시 ‘흙길을’ ‘맨발로’ 걸어야 하는 등 – 으로 인해 생겨난 개념으로, 신발을 신고 걷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관심 밖의 일이지만 맨발로 걷는 사람들에게는 절실한 권리다.        


알고 있다시피 맨발 걷기는 일반 보행도로와는 달리 반드시 흙길이 있어야 한다. 포장도로나 야자매트가 깔려있으면 접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맨발 걷기는 발을 보호해 주는 신발을 벗고 걸어야 하는 만큼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노면 등 환경이 관리되어야 한다. 위생을 위해 흙먼지나 진흙 등을 씻을 세족장 등 시설이 갖춰져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맨발권은 지자체 등 공공기관의 관심과 지원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은 길을 관리하고 시민의 편익을 증진해야 할 책무가 있는 지자체 등에 대해 흙길 조성부터 편의시설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구를 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달 시의회 주관으로 열린 ‘OO시 맨발 걷기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해 확인한 시민들의 요구는 실로 다양하여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것을 요구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였다.


자기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에 황톳길을 조성해 줄 것부터 시작해 이미 설치된 야자매트는 걷어내거나 그 옆에 흙길을 조성할 것, 시에 전국적인 맨발 걷기 성지가 될만한 랜드마크를 만들어 줄 것, 세족장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설치해 줄 것, 학교 운동장에 황토를 깔아 줄 것 등등 요구사항과 제안이 봇물 터지듯 했다. 의견들이 모두 반영되면 시 전체가 황톳길과 맨발 걷기 관련 시설들로 덮이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이런 주민들의 요구에 대해 지자체 등은 주민들의 요구 강도에 따라, 또는 자치단체장이나 시의회의 관심도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고 있다. 내가 사는 OO시의 경우는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해 관내 2개소 4km의 숲길을 맨발 걷기 좋은 길로 조성하기 위한 예산을 편성하였다. 지자체가 시민들의 맨발권 보장 요구에 반응해 준 좋은 사례다.       


이처럼 맨발 걷기를 하는 시민들의 요구와 지자체의 관심이 일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은 대부분의 지자체가 시민들의 맨발권 요구를 충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더해 황톳길 조성이나 편의시설 설치 등에 따른 자연환경 훼손 문제, 우리 동네에 먼저 맨발길 등을 조성해 달라는 ‘우리 동네 우선주의’에서 오는 마을 간 갈등, 일반 시민과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 등은 앞으로 맨발 걷기의 건전한 확산, 즉 맨발권 확산 여부를 좌우할 핵심 현안으로 대두될 것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권리가 당연한 권리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듯 전에 없던 맨발권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당연한 하나의 권리로 받아들여지고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과 시설관리 주체, 그리고 일반 시민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접점을 찾기 위해 무엇보다도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권리의 주장에 신중해야만 한다. 공원이나 산길과 숲길을 전부 흙길로 만들어 달라는 식의 주장은 삼가야 한다. 조금만 비가 내려도 진창이 되고 흙이 쓸려나가는 길에는 야자매트 등 보완책을 강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일 인정해야 한다. 또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눈비에 진창으로 변하는 흙길보다는 야자매트가 깔린 길을 선호할 수도 있다는 점도 생각을 해야 한다.  

    

맨발길 곳곳에 세족장이나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는 주장들도 한 번 더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시설로 인해 자연이 제 모습을 잃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뻔하다. 자연이 살아있는 흙길을 사랑하고 그 흙길에서 건강을 찾고자 한다면, 신발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기꺼이 맨발을 택했듯 기꺼이 얼마간의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렇듯 맨발권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조화 속에서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에 동화될 때만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 역시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보호할 때에만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조건부 권리라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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