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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 Jan 19. 2022

왕숙천에서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


 왕숙천(川)이 조용하다. 아침이면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했던 산책로가 오랜만에 고요하게 잠들어 있다.  어제 오후 눈보라가 몰아쳐 산책로에 눈이 많이 쌓였기 때문이다. 오리 한 마리가 앞에 가고 그 뒤에 다섯 마리가 쪼르르 쫓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카메라를 들이대자 재빠르게 헤엄쳐 멀리 가벼린다. 평소에는 많은 철새들이 있었는데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눈 쌓인 산책로에 듬성듬성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 걸었더니 왕숙천을 횡단할 수 있는 다리가 나왔다. 다리에 올라서서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걸어왔던 길이 훤하게 보였다. 알사한 강바람이 단숨에 달려들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저만치 아파트가 보인다.  넓은 벌판에 우뚝우뚝 심어놓은 듯한 고층아파트 여덟동. 저 중에는 내가 방금 전까지 따뜻하게 지냈던 우리 집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정다워 보였다.  어디쯤 있을까? 단숨에 눈이 가서 머무르는 오른쪽에서부터 세 번째 102동. 위에서 아래로 두 번째 층. 시간만 나면 이족을 보며 시간을 보냈을 개수대 앞 창문이 보일락 말락 아주 작아 보였다. 그래도 난 그 작은 창문에 한동안 눈이 멈추어졌다.

  작년 사원의 중순쯤이었다. 새벽에 운동을 마치고 동호인들과 아침을 먹었다.  한동안  운동이야기가 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시들해질 즈음, 그들 중 한 사람이 오늘처럼 운동도 하고 이렇게 밥도 먹고 웃으니 참 행복하다고 말문을 열자 서로들 맞장구치며 한 마디식 보탰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나도 가까스로 끼어들었다.

"저는요, 우리 집 주방에 조그만 창문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로 내다보면 왕숙천변에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는 것이 한눈에 보이거든요. 그걸 보고 있으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난 밥 먹고 발 닦고 마누라 옆에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

그러더니 그는 우하하! 크게 웃어댔고 그 바람에 같이 있던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설사 내가 분위기에 맞지 않은 썰렁한 이야기를 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무안하게 딱 잘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그 사람의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내색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창문을 아예 '행복의 창문'이라고 이름까지 지었다.


 삼 년 전 겨울. 이곳에 살겠다고 계약했을 당시에는 주위 환경이 조용할 것 같다는 것과, 고층이어서 막힘없이 확 트인 전망을 누려보겠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봄이 되면서 우린 이사를 하였고, 24층 거실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잠만 자고 일어면 새로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풍경이 늘 새롭게 펼쳐졌다.  어느 날은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회색 물감으로 휘장을 치며 빗줄기를 죽죽 그어대면, 나는 시큼시큼한 김장김치 송송 썰어 김치전을 부치고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감청색으로 휘장을 쳐 놓은 날에는 지난여름 친구들과 함께 갔던 소매물도의 짙푸른 바닷물이 생각나 앨범을 뒤적이기도 했다.  때론 스케치북을 펴 놓고 엎드려 뭉실뭉실 떠다니는 구름을 그리기도 했다.  

 아침을 준비를 하기 전에 환기를 시키면서 창문을 열었다.  하루 종일 봄비가 내리고 다음날 아침 창문을 열다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저게 뭐야?"

내 호들갑에 남편이 옆으로 와서 무슨 일인가? 밖을 내다보며 한마디 했다.

"이야, 봄이라고 싹이 나왔나 보네."

 까무잡잡했던 완숙천 주변이 눈에 띄게 연녹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알 수 없는 주인공은 아파트와 가까운 주변에는 확연하게 노랗게 물들여놓았다.  산책하면서, 날마다 생동감 있게 변하는 주인공이 유채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에는 하루에도 몇 번 식이나 꽃물결이 어디쯤 올라가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창문을 열었다.  유채꽃의 물결은 볼 때마다 꿈틀거리듯 북쪽으로 향했다.  보고 있을 때는 멈추었다가도 안보는 사이에는 저만치 밀려나가듯 잔잔하면서도 그러나 분명히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려면 키가 작아서 까치발을 하는 나에게 남편이 발판까지 만들어 주었다.  왕숙천은 봄이 되면서 휴일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조구장은 한참 떨어져 있
었어도 활기찬 몸짓ㄷ이나 응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앞쪽에는 배드민턴장과 농구장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주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간혹 아이가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지 비틀비틀 돌아가는 핸들과 시름하는 것도 보이고 아빠의 두 손을 잡고 인라인 스케이드를 타는 아이도 보였다. 그럴 때면 우리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해 질 녘에는 이른 저녁을 먹고 자전거를 끌고 나가 그들 틈에 합류하여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여름이 되자, 남편은 자주 왕숙천으로 붕어 낚시를 나갔다.  그는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나는 뜨거운 햇빛이 무섭다고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심심해져 창문으로 내다보며, 내가 찾을 수 있는 자리에서 벗어난 예가 드물어 금세 찾아냈다. 멀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파란색과 흰색과 빨간색을 규칙적으로 배색한 파라솔, 감청색 모자를 슨 남자, 혼자 앉아 있다는 형체가 보이면 틀림없이 남편이었다.  그날따라 파라솔이 많이 보였다. 알록달록 천변을 멋지게 수를 놓고 있는 모습이 활기찼다.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 많았는지 천변 주변 위에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남편이 궁금해져 얼른 밖으로 나갔다.

"여그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여기 큰 놈들 잡았으니까 한번 봐봐".

남편은 반가워하며, 살림망(낚은 물고기 넣어 물속에 담가 두는 그물)을 들어 보였다.

"먹지도 못할 것들, 잡으면 뭐해?"

나는 속마음과 다르게 툴툴거리며 파라솔 속으로 들어가 잔잔한 물결을 보다가 지루해져 이내 꾸벅꾸벅 졸았다.


 백설기 같은 하얀 눈길을 걷는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발자국을 남긴다. 아침해가 수면으로 떠오르고 멀리서 새들이 날아드는 것이 보인다.  햇살이 비친 강물 위로 하늘하늘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왕숙천도 꿈틀꿈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이제 곧 행복한 봄이 또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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