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잠시 쉬어도 마음은 더 단단해지고 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2주가 훌쩍 넘어가고 있다. 모두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느라 설렘으로 분주한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특별한 '프로젝트'와 마주하게 되었다. 작년 건강검진에서 발견된 대장 용종 하나가 결국 나를 이 낯선 길로 이끌었다.
제거는 마쳤지만, 점막 아래 숨어 있던 녀석 때문에 '점막하박리술'이라는 길고 낯선 이름의 수술을 권유받았다.
혹시 나쁜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일단 제거해 봐야 안다"는 말뿐이었다.
크기는 작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에도 불구하고, 새해부터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뽀얗게 흐리게 만들었다. 왠지 모르게 한 해의 시작이 잔뜩 흐려지는 느낌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입원 날이 다가왔다. 평소처럼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는 식자재 마트에 들러 카트 한가득 장을 보았다. 고등학생이 되는 막내는 방학이라 집에 있을 것이고, 내가 며칠이라도 없으면 괜히 밥 차려 먹는 것이 귀찮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식탁 위에도, 냉장고 안에도 먹을거리를 듬뿍 채워 넣었다. 어쩌면 살림하는 주부로서의 마음이 내 몸을 바쁘게 움직이게 했던 것 같다. 아빠는 아프면 안 된다는 무언의 강박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주함 한가운데서도, 결국 나를 환하게 웃게 만든 것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대학생인 딸은 요즘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주말 부부로 생활하는 공무원 엄마가 울산에 있으니 자신이 '아빠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며, 아르바이트도 며칠 비워뒀단다. "아빠, 내가 있잖아!" 하는 든든한 말을 들으니, 고맙고 기특해서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딸아이의 이런 따뜻한 마음 덕분에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문득 10년 전 왼쪽 발목 인대가 끊어져 보름 넘게 입원했던 때가 스쳤다. 그때도 그랬지만, 병원복은 늘 낯선 것이다.
내 옷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해서, 마치 이 옷이 나를 '환자'라고 딱 규정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묘했다. 그럼에도 그 어색함 속에서도 내 가방에는 언제나 든든한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바로 패드와 키보드다!
'그래, 병원에서 보내는 이 특별한 시간도 글로 남겨보자'는 생각이 문득 스며들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며칠 동안 이 낯선 공간에서 펼쳐질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따뜻한 감성으로 정리해서 나누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생겨났다.
그렇게 기본 검사를 마치고 드디어 저녁 첫 병원 밥이 나왔다. 대장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건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맑은 국물 두 종류와 흰쌀밥,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싱거운 간장 두부조림, 영유아 이유식에나 나올법한 밍밍한 돼지고기 장조림이었다.
간호사님이 어차피 저녁에 약 먹고 속을 비워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밥은 먹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에 절반 정도 뜨고 치워버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병원에 오니 하루에 두 번도 잘 보던 대변이 나오질 않는다. 이 환경도 낯선 모양이다. ㅎㅎ
잠시 후 간호사님이 오셔서 내일 수술에 대해 설명해 주셨는데, 대장이 2mm 정도로 얇은 부위라 천공과 출혈이 가끔 생긴다며 은근히 겁을 주신다.
'아니, 천공은 의료과실이지, 왜 이걸 당연한 듯 얘기하시지?'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의 상황, 그러니까 부작용으로 100에 하나 긴급수술이 필요할 경우 보호자 동의가 필수라서 수술 시 반드시 보호자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내가 딸아이가 보호자로 온다고 말씀드렸더니, "따님이 미성년자는 아니시죠?"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딸아이가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간다고 했더니, 간호사님 왈, "연배가 저랑 비슷하신데 일찍 결혼하셨나 봐요!"라고 말한다. ㅎㅎ
아무튼, 긴급수술을 받을 상황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이지만, 내 곁에 인생짝꿍 와이프 말고도 성년이 되어 보호자로 있을 수 있는 딸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마냥 흐뭇했다. 딸 덕분에 내 마음이 한층 더 든든해진 기분이었다.
저녁 먹고 오늘은 푹 자야지 하는 찰나, 곧 이어서 저녁에 속 비우는 약 먹고 화장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미친놈처럼 씩 웃음만 나온다. 아마 올해 시작도 하기 전에 뭔가 잘 되려고 이러는 것이겠다 액땜을 제대로 하는 중이겠다 하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이 몸의 작은 '리모델링'이 언젠가 나를 더 단단하고도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조용히 품어본다. 몸은 잠시 쉬어가지만, 마음은 늘 글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꿈꾸는 나의 '새해맞이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어색한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가족의 사랑과 글을 쓰는 기쁨으로 채워갈 나의 회복 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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