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느린 아이가 아버지를 구했다.

by 박정민

No-86

브런치스토리 매거진 <Daily life>


넷플릭스 화면 속, 한 남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에게 아들이 있는데요… 발달장애가 있어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칼 다루는 솜씨와 플레이팅을 겨루는 무대에서, '프렌치파파' 이동준 셰프는 갑자기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방송 특유의 극적 장치쯤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에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오래 일해온 자리가 있다. 발달장애인주간활동센터. 매일 아침 센터 문을 열면 그들이 온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때로는 낯선 소리를 내며, 가끔은 아무 이유 없어 보이는 이유로 웃으면서. 나는 그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퇴근할 때면 종종 생각한다. 오늘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이동준 셰프의 이야기는 그 질문에 새로운 각도를 비춰줬다. 아들 재진이의 다름을 처음 알아챈 건 두 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눈 맞춤이 부족했고, 말이 늦었고, 장난감을 유독 가지런히 줄 세우곤 했다. "그저 규칙적인 아이인 줄 알았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수많은 부모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하면서, 혹시 하면서, 결국 진단지를 손에 쥐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 얼굴들.


셰프는 아이를 위해 국내 치료 환경을 샅샅이 조사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발달장애 진단과 상담까지는 보험이 됐지만, 정작 아이가 세상과 연결되도록 돕는 재활 치료 대부분은 비급여였다. 비용은 고스란히 부모 몫이었다.


나는 이 대목이 낯설지 않다. 센터에 오는 이용자들의 부모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이 분들은 너무 오래, 너무 혼자 싸워왔다는 것. 사랑 하나로 버텨온 시간들이 얼굴에 새겨져 있다.


셰프는 결국 미국을 택했다. ABA, 즉 응용행동분석 치료의 본고장. 그리고 거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장애 아동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환경. "장애인은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부끄러웠다. 우리는 아직 그 편견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


4년 반의 치료 끝에 재진이는 나아졌다. 사회성도, 감각 반응도. 하지만 셰프는 말한다. 정작 더 많이 변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고. 그는 그 시절을 '비바람'이라 불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다음 말이다. "그 비바람을 피했다면, 더 무서운 것을 만났을 것"이라고. 고난이 오히려 나를 지켜줬다는 역설. 이 말이 며칠째 머릿속에 남아 있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가장 힘든 이유가 뭔지 아는가. 셰프는 그것이 '비교'라고 했다. 아이 자체보다, 아이가 뒤처진다는 느낌이 부모를 무너뜨린다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행복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데, 부모가 먼저 무너진다고.


나는 이 문장 앞에 한참 앉아 있었다.

센터에 오는 이용자들을 보면, 그들은 대체로 맑다. 오늘 누가 왔는지 기억하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온몸으로 기뻐하고, 자기가 만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 달려온다. 그 표정을 세상이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편견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셰프에겐 꿈이 생겼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

단순히 장애인을 고용하는 식당이 아니다. 요리, 커피, 서비스 등 분야별로 직업 교육을 하고, 각자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현장에 투입하는 곳. 손님들이 그들의 능숙한 솜씨를 보며 편견을 스스로 내려놓는 공간. 그리고 그 음식에서 순수한 감동을 느끼는 경험.


나는 이 구상을 읽으며 오래된 질문이 떠올랐다.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우리 센터에서도 늘 고민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채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 일이 있고, 역할이 있고, 자기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감각. 그게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셰프는 "아이의 꿈을 부모가 대신 설계할 수 없다"라고 했다. 비장애인도, 장애인도. 자식은 내 마음대로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의 시작이라고.


재진이는 지금 열세 살이다. 아버지와 매일 두 시간씩 운동을 하고, 좋아하는 디저트 수업을 함께 들었다. 셰프는 말한다. "재진이 덕분에 남들보다 건강해졌다. 오히려 재진이가 나를 고쳐준 은인이다."


은인. 참 쉽지 않은 단어다. 그 단어 하나에 4년 반의 이민 생활이 담겨 있고, 비바람이 담겨 있고, 무너지지 않으려 버텼던 밤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지나 아들을 '은인'이라 부른다.


나는 오늘도 센터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 것이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어쩌면 그들도 나에게 은인인지 모른다. 느리게 사는 법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오늘이라는 하루를 온전히 누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


조금 느린 세계는, 사실 더 깊은 세계다.

발달장애인주간활동센터를 운영하며, 매일 그들에게서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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