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87
<브런치북> 자원봉사관리자의 현장 에세이
2007년 12월의 태안은 검었다.
하늘도, 바다도, 갯바위도, 그리고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방제복도. 모든 것이 기름으로 뒤덮인 그 해안선 위에 나는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 철벅이는 검은 파도 소리, 그리고 말없이 솔을 문지르는 수백 명의 손길들. 그 장면은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때 자원봉사관리자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였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봉사자를 모집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이 내 일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태안은 달랐다. 현장이 나를 불렀고,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부름에 응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파도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학생, 직장인, 노인, 주부, 군인, 스님까지. 누가 부탁한 것도,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방제복을 받아 입고, 이름도 묻지 않고 옆 사람과 나란히 서서 솔질을 시작했다. 말이 없어도, 서로를 몰라도 그들은 하나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봉사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
의무가 아닌 마음. 보상이 아닌 연대. 기록이 아닌 존재. 그것은 내가 교육에서 배운 자원봉사의 정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살아있는 언어였고, 숨 쉬는 현장이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였다. 하지만 그 사고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3개월 만에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그 바다를 찾아왔다는 것. 세계가 놀란 숫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 숫자보다 그 안에 담긴 이름 없는 얼굴들을 더 오래 기억한다.
추운 겨울 새벽, 도시락 하나 달랑 들고 버스에 오른 사람들. 방제복이 몸에 맞지 않아 뒤뚱거리면서도 웃던 중학생. 무릎이 아프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할머니. 그들의 손이 닿은 자리마다, 검은 바위 아래로 조금씩 원래의 빛깔이 돌아오고 있었다.
바다는 그렇게 되살아났다.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마음으로.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자원봉사관리자라는 일이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 선한 마음이 올바른 곳에 가 닿도록 안내하는 일, 그리고 현장에서 피어나는 기적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일.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이후 16년을 그렇게 살았다.
재난 현장을 누비고, 마을 어귀에서 주민들과 둘러앉고, 기업 봉사단과 함께 땀을 흘리고, 지쳐 떠나는 봉사자를 붙잡으며 함께 울기도 했다. 화려하지 않았다. 때로는 너무 지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날들이 내 생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잊히지 않아야 할 사람들, 기억되어야 할 순간들, 그리고 여전히 현장 어딘가에서 묵묵히 손을 내밀고 있을 당신을 위해 쓴다.
태안의 검은 바다가 내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이 이야기도 조용히 당신에게 말을 걸 것이다.
당신의 작은 손길이, 누군가의 세상을 바꿉니다.

다음 화에서는 자원봉사관리자로 처음 일을 시작하던 날, 그리고 '나는 관리자인가, 동반자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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